나는 감사의 화신, 방사선사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를 읽고
내가 매일 드나드는 브런치방에는 스타 작가가 살고 있다. 일명 천.재.작.가.
그는 출판을 하기까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출판사마다 투고를 거듭했다. 그 비밀스럽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힘 있는 필체로 재미있게 써 내려가 독자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를 출간한 류귀복 작가이다.
제목에서 눈치를 챘듯 저자는 치과에서 일하는 방사선사이다. 글 쓰는 실력으로 봐서는 전업 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손수건 없이 독서를 이어간다면 눈물방울로 책을 적실지도 모를 만큼 묘사력이 탁월하다. 문장에 은근한 매력이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 책에 푹 빠지게 한다. 어쩌면 1인 3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도중 슬며시 올라가던 입꼬리를 갑자기 확 끌어내리며 눈물을 쏙 빼놓기 때문이다. 브런치 독자라면 이미 간파했겠지만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으니 마술사라는 직업도 걸맞지 않을까.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1부는 방사선 구역(열두 편), 2부는 가운과 크로스(열한 편), 3부는 아빠는 일인다역(아홉 편), 4부는 숨은 행복찾기(아홉 편)으로 되어 있다. 총 42편의 주옥같은 글을 읽다 보면 명상을 하듯 마음이 정화되면서 순해진다. 너무 무거운 글이 아닐까, 지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문장마다 넘치는 위트와 비유가 숨어 있어 입꼬리를 절로 올리게 하니까. 그렇다고 재미있는 이야기냐? 전혀 아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을 펌펑 쏟게하려고 아예 작정한 것 같다.
"당신은 잘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소설도 아닌 것이 손에서 떼어놓기가 어렵다. 이틀에 걸쳐 다 읽고나서 감동의 여운을 차분히 되살리려고 한 번 더 읽으면서 필사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너무 많아 공책을 몇 장이나 넘겼는지 모른다. 죽어도 세끼를 먹어야 사는 나는 '행복'과 '감사'라는 양식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배가 불러서 저녁도 걸렀다. 그렇다면 어느 대목에서 가장 심쿵했을까. 어느 글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감동을 받았을까 곰곰이 되돌아가보자.
이야기의 배경은 주로 가정과 직장이다. 아, 신변잡기에 불과하구나,라고 단정 짓는다면 저자에 대한 큰 실례이다. 글 속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인간관계의 끈끈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대학 후배를 불러내 추억을 이야기하고, 군대 시절의 군의관을 불러내 가슴을 뜨뜻하게 데워준다. 선배와 후배를 주인공으로 한 직장생활의 훈훈한 풍경도 고스란히 공개한다. 산타클로스를 등장시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알리 마티스와 르누아르 화가를 등장시켜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살살 긁어주기까지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주인공인 아내와 딸의 무수한 이야기는 언제나 코끝을 찡하게 하다 결국 최루탄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든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어찌나 선한지, 열반이 궁극적인 목표인 불교에 귀의한 도인이 아닌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낸 평범한 오늘이 작가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하루이다. 로비에 성당이 있는 건물 앞에서 평생 가지고 갈 난치성 질환을 위해 주사와 약 복용을 견뎌내며 끝없이 감사한다. 힘겨운 나날이지만 잠깐씩 비치는 햇살이 행복을 전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부당하다고 소리치는 환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침착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환자의 억울함을 이해하고 함께 위로받기 위해 뭉크의 절규를 검색했다는 저자의 공감능력에 마음이 쿵한다. 영상 한 장이 환자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때로는 '절망과 슬픔'을 주는 파트를 맡기도 하지만 화려한 스펙의 악역에서 주어진 배역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소크라테스를 불러내 '너 자신을 알라'는 일침을 가하는 메라이언의 법칙에서는 무릎을 탁 쳤다. 내가 밝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에 소중한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내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 덕분이라는 걸 나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면접시험장에서 시키지도 않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은 빙그레 웃음을 띠게 한다. 최고의 스펙으로 도저히 겸손할 수 없었던 자신감이 겸손은 힘들어에서 낙방으로 이어지는 순간, '겸손이 무기'라는 명언을 지어 냈다. 현재 우리나라 최고 비싼 땅,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는 병원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행착오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투자 경험담은 재미와 함께 심금을 울린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실천해 나간다. 경제적 빈부격차보다 '독서 빈부격차'를 걱정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라고 권한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고, 의지가 없는 거다. 삶에서 원하는 것을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인생공략집'이 바로 책이라 정의를 내린 저자는 아무튼, 책 선물을 잘하는 인물이다.
난치성 질환인 강직성 척추염 환자가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과연 낭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저자는 낭만이 현실을 이긴다고 주장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작은 키는 어쩔 수 없지만 아내에게 꽃다발은 보낼 수는 있지 않냐면서. 직장으로 꽃배달을 보낸 후배의 남자 친구한테서 낭만을 벤치마킹한 뒤였다. 부족한 꽃바구니의 크기를 마음에 울림을 주는 문구에 힘을 실어 만회하는 대목이 있다. 역시 꽃보다 문구다.
-수현야, 사랑해, 다시 태어나도 나랑 살자-
22명의 여자 직원과 4명의 남자 직원이 있는 직장 내에서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의 풍경은 어떨까. 상술이라고만 치부했던 특별한 날, 동료 간에 나누는 자그마한 물질이 얼마나 훈훈한 정을 자아내는지 슬기로운 직장생활에 잘 나타난다. 사탕이나 초콜릿보다 문구에 더 신경을 쓰는 자상함이 단숨에 직장을 꽃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m"이라는 여섯 글자로 사람들을 울렸다지만 저자는 단 네 글자로 여직원들을 꽃으로 둔갑시켰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꽃밭에서, 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미건조할 수 있는 직장에서 센스와 기지를 발휘하여 달콤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영웅이다. 그 영웅은 오늘도 내일도 '낭만은 현실을 이길 수 있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500그램으로 세상에 태어난 동료 직원의 아이에 대한 존버하자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희망적이다. 인큐베이터에 몸을 누인 아이한테 미안해서 소리 죽여 눈물을 훔치는 부모의 모습에서 나도 눈물을 떨구었다. 네 살 되던 해에 뇌수막염이 의심되어 척수를 빼내느라 새우등처럼 구부리고 커다란 눈망울만 꿈벅거리던 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른둥이에게 끈질기게 존버해서 성장해 나가자고 외칠 때 나도 따라 힘껏 외쳤다.
방사선사의 환자겸임은 온몸에 뼈가 없는 것 같은 근육통을 하소연하는 저자한테 엄마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엄마가 아프게 낳아주어서 미안해"
이 말을 듣자 눈물샘이 폭발했다고 한 저자처럼 나도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독서실에서 필사를 하던 중 눈물이 책상 위로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나면 왜 콧물까지 춤을 추는지, 결국은 화장실로 뛰어가 잠시 꺽꺽대야 했다.
일찍 알았더라면 군대를 가지 않았도 되었을 텐데,라고 위로해 주는 말을 저자는 거부한다. 타인의 눈이 아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행복하면 충분하다며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나 보다. 군대에서 위급한 환자를 알아내어 민간 병원으로 급히 이송시켜 주었던 군의관을 명의로 만든 이야기도 사람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감동을 준다.
좋은 사람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걸까. 청첩장을 주러 온 후배한테 밥을 사주는 따뜻한 마음의 바탕은 저자가 결혼할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가 첩첩장을 내밀었을 때, 친구들이 1,2,3차를 모두 내준 경험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때부터 내 일처럼 축하해 주면서 밥까지 사주면 축하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된다는 믿음에서 주저 없이 밥값을 지출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역시 감사 바이러스는 끝없이 퍼져나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곤한다.
카페 비그린은 파주에 있는 지인의 카페인데 아이들과 함께 동심으로 뛰어놀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밤이 되면 '불멍'을 통해 속세에 쌓인 마음의 짐을 태울 수도 있다. 도대체 불멍을 왜 하면서 시간을 소비할까 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말끔히 해소되었다. 나도 까끔 불멍이라는 것을 하면서 속세의 찌든 때도 태우고 신세대 감각도 누려봐야겠다.
실패하지 않는 투자를 원한다면 취향에 맞는 다양한 북을 선택하자고 하는 저자는 책을 읽으면서 남자의 눈물을 자주 보여준다. 통장 잔고의 변화는 없을 수 있지만 독서를 통해 삶의 만족도와 자존감은 크게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매일을 두근거리는 삶으로 채우고 싶다면 마니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내의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은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남편이다. 힘든 과정에서도 매일 딸아이와 함께 강도 높게 놀아주는 멋진 아빠는 달을 매일 보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딸이 언제나 건강하게 자라기를 마음으로 기도한다.
걱정 번역기를 달고 사는 나도 앞으로는 작동을 멈추고 부족했던 잠이나 푹 자보고 싶다. 그나저나 아직도 내 입안에 예의 바른 사랑니 하나가 살고 있으니 뽑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걱정이다.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그 병원을 한번 찾아가 볼까? 그곳에는 발치의 신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진짜 속내는 그곳에서 일하는 감사의 화신, 방사선사의 사인 한 장 받고 싶은 욕심일 테지.
류작가는 요술쟁이이다. 독자를 웃게 만들고 싶으면 재미있는 문장으로, 울리고 싶으면 슬픈 문장으로 사람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절절한 표현이 나한테 겸손하라 전하고, 마음의 부자가 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며 독서에 게으른 나를 독려한다. 자녀 교육은 이렇게 하는 거라 지침을 알려주고, 아내와 함께 사는 모습을 공유하면서 부부가 사랑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준다. 물론 자세한 비법은 책 안에 있으니 마음의 안정과 가정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소장의 가치는 충분하다.
최근에 중국 소설가 '위화'의 소설에 푹 빠져 읽고 있다. 하나의 사실을 말할 때, 문장을 통째로 비유하는 능력이 어찌나 탁월한지 기가 막힌다. 류작가의 문장이 위화의 문장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묘사력 덕분이 아닐까. 앞으로 소설을 써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조언을 해두며, 과연 또 다른 어떤 출판사가 류작가에게 눈독을 들일지 자못 기대가 크다.
이제 나는 저자의 질문, "당신은 지금 잘 지내고 계시나요?"에 대한 답을 할 차례이다. 잘 지낸다의 기준치를 낮추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이 책을 소장했으니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는 지금 과분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