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들어와서 놀 수 있는 마당이 있다. 일명 ‘브런치 스토리’ 마당. 문자라는 놀잇감을 가지고 마음껏 놀고 싶어서 ‘작가’라는 자격증까지 받아놨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요 핑계 조 핑계를 대며 통 들어오지를 않았다. 물론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빈둥거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혼자 웅크려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슬쩍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한 마음도 고개를들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좀 들어가 볼까.’
마당으로 들어설 때면 역시 오래된 습관처럼 기대감이 상승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이 파문을 일키며 나한테 안겨올까,하는.
맨 먼저 내 방부터 들어가 본다. 냉기가 돌 정도로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방을 꾸미기는커녕 들어와 본 횟수도 뜸했으니 누구를 탓하랴. 불 피울 생각은 없이 방에서 온기를 찾는다면 그게 바로 도둑 심보 아닌가.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했거늘 모든 것은 내 탓이다. 열심히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린 자만이 싹트기를 기다릴 수 있는 법이다. 꽃도 나무도 없는 황무지에 누구의 빌길을 기다릴 것인가.
하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다고, 애정은 식지 않았으니 여기저기 기웃거려본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전에 올렸던 글에서 댓글 하나를 발견했다.
‘어라?누구지?’
짧은 문장에서 내뿜는 열기가 후끈했다. 문장을 읽는데 가슴은 이미 회오리바람과 함께 감동의 물결로 요동쳤다.
‘작가님, 요새 바쁘세요? 뜸하셔서 궁금합니다.’
한국인의 정서가 담뿍 담긴 것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생각할수록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문만 살짝 열어보는 사람도 좋고, 인기척 내며 라이킷을 살짝 눌러준 사람도 고마운데. 이렇게 댓글이라는 정표까지 남겨주다니. 그것도 평소 알고 지내던 가까운 사이에서나 주고받을 법한 정다운 말이 아닌가. 도대체 누구일까? 흔적을 따라 클릭을 몇 번 해보니 대번에 그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변방에서 조용히 외로움을 달래며 웅크리고 앉아 있던 병사. 이 끝없는 전쟁터에 그냥 있어야 하는가, 군복을 벗어던져야 하는가. 복잡한 생각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기골이 장대한 장군이 병사 앞으로 다가섰다.
‘앗,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쟁터에서 매일 둥둥 승전고를 두드리며 사방에 이름을 휘날리는 분이 아닌가? 더구나 전술 능력이 출중하여 다른 장군들도 부러워하는 분이렷다.’
병사한테 쭈뼛거림은 이미 익숙해진 통과의례와 같다. 떨쳐버릴 수 없는 의기소침함으로 가슴 졸이며 장군을 올려다본다. 장군이 갑자기 양팔을 쭉 뻗더니 커다란 손으로 병사의 어깨를 ‘탁’ 친다.
“요즘 바쁜가? 통 볼 수가 없으니.”
다정한 말까지 건네받은 병사, 인정사정없이 맥박이 뛰어오르는 걸 느낀다. 새색시처럼 얼굴이 벌게지는 것도 모자라 청양고추를 씹은 듯 온몸에 고열이 오른다.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장군이든 병사든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다. 어떤 상황이든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준다. ‘적자생존’의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남을 돌아볼 여유가 부족한 이 벌판에서 살가운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어깨를 쭉 펴고 어서 대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발을 맞춰야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감정이 다를 뿐, 내가 틀렸거나 부족한 건 아니야. 꾸준히 걷다 보면 나도 환호를 지르는 저 무리 속에 합류할 수도 있는 거잖아.
멋모르고 들어온 이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꾸만 가라앉고만 있던 나. 내게 지푸라기가 아닌 튼튼한 구명조끼를 던져준 거나 마찬가지다. 구명조끼를 걸치기도 전에 나는 서서히 물 위로 뜨는 걸 느낀다. 정신 차리고 위로 올라오라는 댓글에 힘이 난다. 말 한마디가 이토록 위대한 힘을 발휘할 줄은 미처 몰랐다.
댓글을 써 주신 주인공은 바로 김미선 작가님이다. 사실, 김미선 작가님은 탄탄하게 중무장한 문장력으로 지적 위트가 녹아 있는 수준 높은 글을 쓰는 분이다. 특히 '조선남자 엿보기'라는 책은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아주 재미있는 글이다. 생생한 글을 읽다 보면 조선남자인 남편을 표현해 내는 작가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런 분이 나에게 관심 가져주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김미선 작가님의 댓글 회초리에 정신을 차려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처럼 변방에서 고개 숙이고 있는 여린 병사가 있다면 똑같은 댓글 회초리를 전달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