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 다시 열리다
열흘 동안 나가있던 사람이 돌아왔다.
이제 열흘의 여유가 끝이다.
가출 아닌 가출은 늘 그렇듯이 돌아오는 길은 빨래뿐이다.
캐리어를 열어보니 쉰 내가 화라락 갇혀있던 공기를 내뿜는다.
바지에는 말레이시아산 도깨비풀이 잔뜩 꽂혀있고,
바지 밑단에 황토흙이 많이 묻어있는 걸로 봐서 공치기 좋은 환경은 아닌 듯했다.
저 푸른 초원이 아니라 저 붉은 운동장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그 더운 땡볕에서 가만히 있어도 더울 판국에 운동은 얼마나 땀을 부추겼을까.
얼굴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온 어느 촌노가 되었고,
목덜미는 옷깃으로 흑백의 경계선이 뚜렷했다.
"어디서 온 뉘시오? 혹시 아프리카에서 여길 잘못 찾아온 것 아니오?
여긴 한국이라오,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흐흐흐."
웃음소리는 한국인이다.
하기야 웃음은 한국표, 미국표, 아프리카표가 따로 없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닐 텐데 어쩐지 못마땅하다.
당분간은 같이 동행하는 일을 피해야겠다.
저 시커먼 남자하고 동행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게 뻔하다.
지금 여긴 아직까지 시커멓게 탈 일이 없다.
하루종일 밖에서 일부러 햇볕을 쬐지 않는 한 이렇게 까말 이유가 없는 거다.
시커먼 남자는 다시 일상을 시작했다.
여전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열심히 지시를 일삼았다.
이것도 가져와 저것도 가져와 손가락이 분주했다.
저 손가락질이 열흘 동안 쉬었으니 놀리고 싶어서 얼마나 좀이 쑤셨을까.
아침마다 딱 딱 쳐대던 하이파이브도 다시 재개되었다.
시뻘게진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돌아서는데 이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겠지 싶다.
왜 그것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략 생각해 보건대,
출근을 하면서 하루 서로 잘 지내보자고 결의를 다지는 의미일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말로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뭐 이렇게 전달해도 되련만 굳이 손바닥을 부딪쳐야만 살맛이 나는지.
그는 떠나는 날 아침에 공항버스를 타려고 집 앞에서 콜택시로 이동했다.
그래서 밖에 자신의 차를 그대로 세워두고 가버렸다.
아무래도 지하로 차를 옮겨야만 할거 같았다.
옮기려고 그의 차를 탔는데 맙소사.
차라고 다 똑같은 차가 아니었다.
조수석에 한두 번 타본 것도 아닌데 내 차완 생판 달랐다.
기어를 넣는 것부터 생소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지 그게 신기하다.
어찌어찌 원시인처럼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겨우 차를 작동시켜서 지하로 끌어다 놓았다.
그리곤 오면 "나 참 잘했지?"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받고 싶었다.
칭찬들을 일만 남았다고 코밑이 길쭉해졌다.
귀가하자마자 차 키를 들고나간 그 사람.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밥이 다 식어가도록 들어오질 않았다.
식어가는 밥이 왜 그렇게 아까운지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여자들은 밥 차려놨을 때 딴짓하면 화가 나지 않던가.
한참만에 들어온 그를 향해 "아, 밥 다 식었잖아."
짜증 섞인 말투를 던져버렸다.
말꼬리에 매달린 말이 수상했다.
"차를 이상하게 해 놓고 오히려 화를 내네."
"차를 이상하게 해 놨다고?"
"그래 배터리가 나가서 백도 못 실어놓고 살피다가 그냥 들어왔어."
"아니, 왜 배터리가 나가?"
"왜는, 비상등을 그렇게 오래 켜두었으니 나갔지."
"....."
원시인처럼 이것저것 만지다가 비상등을 스친 건지.
일부러 비상등을 켠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잘했다고 칭찬들을 일만 생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식어가는 밥만 아까워서 짜증을 냈다.
자동차에 관해서라면 최고로 무식한 여자.
그 여자가 애쓰고 마음 써놓은 행위는 오히려 불편함을 초래한 것이다.
"아! 몰라, 몰라 으휴."
"똥 싼 놈이 성낸다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호탕하게 웃어주기 망정이기 하마터면 울뻔했다.
서비스센터에 신청을 하고 차를 제대로 작동시켜 놓고 나서야
둘은 한바탕 어이없는 웃음을 쏟아낼 수 있었다.
조선남자도 그럴 때는 화를 내지 않아서 쓸만했다.
혼자만 놀고 온 것이 미안하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그의 마음에 관대함이 자리 잡았겠다.
아무튼 며칠간 떨어져 있으면서 그는 아프리카 인으로,
나는 원시인으로 잠시 변모했다.
공백은 서로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열흘 동안의 자유부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선시대가 다시 개막되었다.
발효되려던 자유가 꼼짝없이 조선시대로 전환되었다.
오늘도 주먹종은 `댕댕댕`이 아니라 `쾅쾅쾅` 으로 시작했다.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으려니 주먹종은 추가로 더 세게 울렸다.
鐘(종)도 개평이 있다네.
나는 글을 쓰거나 책을 보거나 그림 작업으로 매일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반면 그는 늦게 들어오지 않는 한 매번 일찍 취침에 들어간다.
그래선지 아침도 조기 기상이다.
그러니 그의 종지기 생활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 뻔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주먹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얼른얼른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세.
70년대 지역사회를 개발하기 위해 아침마다 울려 퍼지던 새마을운동 노래가
주먹종 노래로 가사를 바꾸면 딱 제격이었다.
조선시대로 다시 들어선 지금, 나는 오늘도 꿈을 꾸다 중단시켰다.
"야호"가 아닌 "에궁" 시대는 다시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변사를 흉내 내도 될 만큼 내가 사는 시대는 조선시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