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큰절을 받다
지난 목요일(27일) 아침 우리 부부는 울산행 기차를 탔다.
2월에 서산에서 만났던 오인방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울산 통도사 역에서 4개월 만에 다섯 쌍이 집결했다.
모임은 언제나 통째로 유쾌하다.
암묵적으로 우리는 모토를 `인생 뭐 있어`로 정했다.
그때만은 명랑한 소년, 소녀다.
울산에서 거제도로 이동하여 거기서 배로 7분 정도 들어가면 `이수 마을`이 나온다.
이수마을은 바닷가에 접한 작은 마을로 거기서 통째로 집을 임대해서 숙식하기로 했다.
숙식을 책임져주니 우리는 그냥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오인방이 모였으니 술이 빠질 리 없다.
물 마시듯 술을 마셔대길래 옆에서 지켜보다가 내가 한마디 했다.
"여긴 오인방이 아니라 오酒방이라고 합시다."
별안간 폭소가 터져서 방안이 시끌벅적했다.
저녁에 거나하게 술이 들어가자 오인방은 그동안 살아오느라 고생한 얘기,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단 걸 화제 삼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단체로 절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할 줄 알았던 양반? 들이 좋다고 흔쾌히 박수를 쳤다.
이게 무슨 일!
오래 살고 볼일이네.
진짜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보네.
다섯 명의 부인은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처럼 쪼르르 정렬되었다.
자기 남편에게 큰 절을 받으면 어떤 표정이 될까.
네 명이 일제히 절을 하려고 허리를 숙이는 찰나.
우리 남편이 바로 옆에 선 사람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옆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아내를 향해 무릎을 구부렸다.
남편은 혼자만 서있기도 어색하고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히긴 했지만 땡감 먹은 표정이다.
뭘 절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난색이 역력하다.
남들은 큰 절을 올리고 앉아서 파안대소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절을 한 남편들은 술김에 칠푼이 노릇을 한 것 같아 우습고,
큰 절을 받은 부인들은 호승감으로 들떠 있었다.
다들 웃음이 진정되자 내가 "저 이의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들었다.
시선이 다 내게 쏟아졌다.
"다른 분들은 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큰절을 올렸는데 우리는 아닙니다."
이러자 절을 제안했던 사람이 "아! 그래요? 그럼 다시 해야지."
"자, 우리도 덤으로 할 테니 세 명의 절을 한꺼번에 받으세요."
두 명이 합세하여 세명은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는 내 앞에 넙죽 큰절을 올렸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 사람들의 절하는 모습을 안방마님의 포스로 지켰다.
이리하여 조선남자는 한 번에 해야 할 절을 두 번으로 늘였다.
일생 처음으로 어머니도 아닌 부인에게 절을 올린 것이다.
하자니 쑥스럽고 안 하자니 뻘쭘한 이 고역스러움.
이마의 진땀이 그걸 대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절을 하긴 했지만 우리 집 조선남자는 여전히 익모초 마신 표정이다.
여~엉 `못마땅해. 못마땅하다고.`
"왜 절 하기 싫었어?"
"에이, 맘속으로 하면 되지 꼭 절을 해야만 돼?"
" 맙소사."
역시 조선남자 맞다.
남들은 기꺼이 웃으면서 절을 했건만 이 남자 혼자만 부글거리고 있다.
맘 깊은 곳에 백번 숨겨놔 봐야 아무 소용없다.
술김에 미친 척도 해보는 거지.
그런 연기를 할 줄 모르니 매번 조선인 일 수밖에 없다.
남들은 다 조선시대를 탈피해서 현대인이 된 지 오래다.
왜 혼자만 조선시대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것도 유별나다.
특히 밖에선 근사한 현대인인데 집에만 들어오면 옷을 갈아입듯이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간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미안해, 고생했어." 읊조렸다면 이젠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젊은 날 그렇게나 기가 셌던 남자들이 이제야 고개를 숙이고 참아내고 견뎌낸
아내들에 대해 참회했다.
비록 술김에 한 행동이지만 큰 절을 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절을 하고 나서도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지 또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그럼 남자들도 절을 받아야지."
"아휴! 그건 아니지."
아내들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가부장 짓을? 했던 과거를 한 번의 큰 절로 사죄한 건데,
여자들은 가부장짓을 안 했으니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것으로 또 한바탕 웃음과 질타가 이어졌다.
기껏 절 해놓고 생색내는 건 안 한만 못하다고 여자들이 한 마음으로 성토했다.
이제는 져줘야만 한다고.
이젠 이미 저물었다고.
오인방 여자들은 남자들의 변화를 더 부추겼다.
살아오면서 남자들도 참 고생 많았다.
뒷바라지하느라 눈물을 바가지로 받아내며 내조한 아내들도 참 힘들었다.
사업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사는 게 너무나 고달팠다.
생의 중압감이 결국은 부부싸움으로 번졌고 그것은 사네 마네로 진입했다.
사네 마네는 하나 보다 둘이 낫겠다고 합심했다.
힘든 고비를 넘기고 오인방은 선방했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자식들도 다 독립했다.
우리만 재밌게 살면 된다고 모이기만 하면 개그콘서트가 벌어진다.
밥을 먹다가도 킥킥거릴 정도로 재밌다.
저녁상을 물리고 큰 상 앞에 둘러앉아 다섯 쌍의 부부들은 노래를 불렀다.
떼창 뒤에 백댄서도 등장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백댄서의 현란한 춤솜씨에 모두가 뒤집어졌다 엎어지면서
분위기는 농밀하게 익어갔다.
잠을 자야 할 바닷가도 함께 술렁거렸다.
어색한 음정 박자가 드넓은 바다로 퍼져나가 화합을 도모해 주었다.
바닷가는 밤늦도록 음치들의 노래를 들어주느라 고역이었다.
이튿날 구조라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해금강과 외도를 향해 둥둥 떠갔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외도는 여전히 조경이 아름답고 신비한 섬으로 남아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빵빵해졌다.
섬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언양 불고기 집도 가보았고, 울산의 해월당 빵집도 가보았다.
이래저래 따져봐도 요번 여행의 진미는 역시 큰 절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에게 큰 절을 받았다.
절을 받고도 괜히 진정성을 따졌나 싶어 마음이 동요되기도 했다.
집에 가서 이 문제가 싸움의 발단이 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다.
남들도 다 했으니 됐다 싶었는지 집에 와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휴우~~ 깊은 심호흡은 항상 대기 중이다.
냉장고를 열면 원자폭탄이라도 터지는 건지 무서워서 냉장고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는
조선남자가 큰절을 했다.
단단하게 조선시대를 묶어쥔 사람에게 절을 받으니 오히려 내가 더 얼떨떨하다.
마치 하녀가 양반에게 절을 받듯이 천지개벽이라도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이번일로 조선스러움이 조금은 현대를 향해 진일보했으면 좋겠다.
눈만 뜨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세상이다.
소행성을 대상으로 채굴 전쟁도 진행 중인 시대다.
이 시점에 혼자만 조선인으로 안주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대착오다.
조선남자 엿보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현대인이 등장하길 고대한다.
그때는 더 이상 조선남자 엿보기가 아니라 현대 남자 엿보기로 간판을 바꿔야 한다.
부디 현대로 앞머리가 바꿔지는 그날까지 아자!
6월 28일 외도는 쾌청.
쾌청으로 인해 외도가 더욱 돋보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