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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Jul 17. 2024

조선남자 엿보기(10화)

세탁기와 조선남자

지난 3년간의 코로나는 우리들을 여러모로 묶어두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두려움과 경계로 점철된  암울한 시기였다.

어떤 특정인 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였다.


뜻하지 않은 전염병은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들에게 참담함과 무력함을 

안겨주었고 생활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1840년 말 영국사회를 혼란 속에 빠뜨렸던 콜레라에 견줄 만큼 심각했다. 

그만큼 코로나 억제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시기를 우리는 잊지 못한다.


"거기도 걸렸대?"

"나도 걸렸어."

만나진 못해도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다 보면 서로 코로나 환자가 되어있었다. 

전화의 주제가 주로 코로나, 코로나.

어린 아기도 코로나는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없는 터널을 지나면서 낙담했고 절망했고 맥이 빠졌다.

어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시기였기에 여기서 해방되기만 해 봐라.

여행부터 갈 테다.


갈망은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다. 

갈망 끝자락에 매달린 목마름, 그걸 해결하는 게 갈망의 첫 번째 행보다.

그리하여 코로나로 굳게 닫혔던 문을 이제는 뾰족한 갈고리로 열어보기로 했다.

꿍쳐놨던 여행 보따리를 다시 보듬었다.


여행을 간다는 들뜸 반대편에 또 다른 걱정이 얹혔다.

내가 이 집을 떠나고 없는 동안  이 집에서 숙식하는 사람이 문제였다.

식사는 사 먹는 걸로 해결한다지만 세탁과 청소는 어째야 할지 궁리가 필요했다.


집안일은  단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청소는 고사하고라도 

빨래는 스스로 해결해야 되지  않을까.

매일 옷을 갈아입어야 할 요즘에  그대로 쌓아둔다면 세탁기 안은 발효창고가 될게 뻔하다.

청국장 창고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고행이기도 하다.

돌아와서 쌓여있는 빨래들과 마주하긴 싫었다.

내 보따리만 해도 빨랫감은 차고 넘친다.

미리 선수를 쳐야 했다.


이참에 나는 또 세탁기 교관이 되기로 했다.

거실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이리 와 봐요."

"왜?"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쳐줄게."


"아냐, 아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어이구, 조선남자야. 아니긴 뭐가 아냐. 언젠가는 배워둬야 써먹지."

자기가 먼저 죽는 게 뻔해서  세탁기는 써먹을 일이 없다는 엉뚱한 논리를 무시하고 

나는 덩치가 나의 두 배나 되는 사람을 잡아 일으켰다.


엉덩이를 쑤욱 빼고 엉거주춤하게 섰는 그를 이끌고 세탁기 앞으로 데려갔다.

그의 표정에  익모초(여름에 먹는 배탈약으로 무지무지 씀)가 또 등장했다. 

마누라의 단호한 태도에 다소 기가 죽어있었다.


" 봐봐요. 이건 세제, 이건 섬유유연젠데 이게 세탁할 때 필요해요."

초등학생도 그건 안다. 우린 처음 보는 물건이고.

"자 그럼 이 세제통을 열고 여긴 이 세제를, 여긴 이 유연제를 넣어요.

선을 넘지 않도록 표시선까지만. 알았죵?"


"꼭 세제통과 유연제 통을 구분해서 붓도록 해요.

세제는 `테크`라고 쓴 거고 `유연제`는 빨간 작약 그림이오."

(어느 별나라 이야긴지)


엉거주춤 끌려올 때 와는 달리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이때 잘못 웃었다간 이 좋은 교육 기회가 파투 날 수가 있다.

웃음은 일단 저축해 두자.


"자 이제부터 잘 들어봐요. 세탁이라고 쓴 전원버튼을 누르면 이렇게 불이 켜지지?

세탁, 헹굼, 탈수가 있는데 그중에서 헹굼만 선택하면 탈수는 자동으로 해결돼요. 

다른 건 건드리지 말고.  이 삼각표시 3초만 눌러주면 세탁이 시작돼요.

어때 쉽지?"


"세탁이 시작되면 딩가딩가 놀아요. 얘가 다 되었다고 소릴 바락바락 지를 때까지.

그러다가 소릴 지르거든 마구 달려가서  뚜껑을 열고  이층 집으로 세탁물을 옮겨요.

건조기 사용법도 쉬워요."


이리하여 나는 사근 사근 세탁기와 건조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싫다고 도망갈 줄 알았던 학생이 고분고분하게 교육을 수료했다.

교관은 흐뭇했다.


세탁기가 처음 들어온 날.

나도 배송을 담당하고 설치해 준 기사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배웠다. 

누구나 처음에는 모른다.

배워야 안다.


일생동안 처음 해보는 신문명 앞에서 혼자 해보다가 잠깐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어 아예 

다시 문서로 남겨두었다. 

공부하다가 모르면 참고서처럼 써먹어보라고. 

















혹시라도 집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면 음식 쓰레기는 절대로 방치하지 말고, 

집안 환경이 불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거듭 강조해 두었다.

지금까지 음식쓰레기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데 이참에 그것도 한 번 버려보면 어떨까. 

가사노동에 대해 전혀 몰랐던 부분을 조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맨날 눈만 뜨면 뭐라고 뭐라고 쫑알대던 종달새가 잠시 집을 떠난다.

때론 듣기 싫었던 잔소리도 보따리를 따라나선다.

저녁에 들어와 손수 컴컴한 실내를 걷어내고  적막강산을 마주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마누라 새가 어디론가 날아간 후 그에겐 어떤 감정들이 몰려올까.


다녀와서  집안이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면  크게 칭찬해 줄 것이다.

그 보상과 미안함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주기로 맘먹었다. 

그렇지 않고 지저분하다면 꿍쳐둔 잔소리가  날아들겠지. 


부디 내가 없는 집안에서  마누라의 부재가 가져올 불편함과 허전함을 

잘 견뎌내고  혼자보다 둘이 살아온 날들이 좋았음을  뼈가 울리도록 절감했으면 한다.

`나 잘 다녀올 테니 울지 말고 잘 있어.`

`베갯잇에 눈물 자국 남기기만 해 봐.`

큼지막한 엉덩이를 마구 패줄 테다.



대문사진 출처: 픽사베이.



독자님들 2주 동안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취소되었던  동유럽 여행을 이제야 실행합니다.

이곳은 예약기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공백을 두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8월 첫 째 수요일 아침에나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입추.

여름을 다 건너뛰고 가을을 맞는 것 같아 아쉽네요.

더위에도 끄덕 없이 건강하게 잘들 지내시고 반가움으로 다시 만나요.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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