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나으리
유럽으로 떠나기 전 나는 조선남자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쳤었다.
싫다는 사람을 일으켜 세탁기 앞으로 데려갔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처음으로 사람과 기계가 교감을 시도한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하길래 이젠 됐다 싶었다.
한 번 알려준 교육이 차질이 생길까 싶어 문서로도 남겨두었다.
그리고는 붕 떠나서 세탁기 일은 까마득히 잊었다.
집 나가서 집안일을 신경 쓰는 건 난센스다.
꾸역꾸역 놀러 다니다 집엘 왔겠다.
세탁기 문을 열었더니 아이고야. 세탁기 안은 초만원이다.
청국장 단지를 만들지 않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한 나의 계획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몇 날 며칠 땀냄새들끼리 모여 앉아 어떻게 하면 더 발효가 잘 될까를 궁리하는 중이었으니.
더 크려야 클 수 없는 세탁기 통속이 이리도 작을 줄이야.
내 빨래는 고사하고 미리 접수된 빨래부터 해결해야 했다.
하루에 빨래통을 세 번이나 돌리는 번잡함이 일어났다.
가사 방임죄로 밀린 집안일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오랜 시간 비행기에서 시달린 몸과 넘어져 아픈 다리를 무시하고 밀린 가사노동에 시달렸다.
저녁에 조선남자가 집으로 어슬렁 거리고 들어섰다.
"잘 다녀왔어?"
"다녀오긴 잘 다녀왔지. 덕분에. 근데 불량학생이네."
"왜?"
"아니, 세탁기 사용법을 그리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문서로도 남겨놨는데 왜 안 써먹었어?"
"......"
"청소도 한 번도 안 했지?"
"......"
"말을 해봐. 왜 안 했는지."
"귀찮아서."
이번만은 변화가 일어날 줄 알았다.
그렇게나 오래 살고도 또 속았다.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다.
작동법을 배울 때부터 이건 내가 할 영역이 아니야.
혼자 다짐했을 터.
국내도 아니고 외국으로 나간 상황이라 이번만은 실행할 줄 알았건만 헛방이다.
절름발이로 하루종일 집안일을 하느라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되었다.
다리는 왜 저냐고 그가 물었다.
사연을 들어봐 봐.
인천공항에서 서울 가는 직통철을 타려고 개찰구를 빠져나오다가 느닷없이 엎어지고 말았다.
`쿵`
캐리어에 걸렸는데 상체는 캐리어 위에 하체는 바닥에 찧었다.
이 묘한 포즈는 사진작가가 발견했더라면 얼씨구나 최고다 최고.
"그대로, 그대로 포즈 좀 잡고 있으세요."
이렇게 요상한 자세는 평생 처음 본다 했을 거다.
상체는 캐리어의 완충작용으로 아프지 않았지만 무릎이 된통 바닥을 내리찍었으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아픈 건 둘째치고 창피했다.
얼른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는데 생각처럼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앞서가던 딸이 뛰어오고 개찰구 안내원이 뛰고 야단 났다.
"으음, 울 엄마 어떡해!"(울먹, 울먹)
"괜찮아."
"정말 괜찮으세요?"(안내원)
"괜찮습니다."
"......"
뒤에 쫓아오던 사람들도 이구동성이다.
"어머, 괜찮으세요?"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몰려왔고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옴팍 옴팍 쑤셨다.
별안간 다리를 절뚝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납작 엎드린 포복자세가 스스로도 민망했다.
캐리어를 타고 넘어갔더라면 아마 면상도 성치 못했을 거다.
누가 `원자폭탄 터진다. 엎드려.`라고 소리라도 질렀든가.
국내에 들어왔다고 포복자세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머리는 웃기고 다리는 아프고.
뭐냐 이 묘한 조합은.
절름발이 상태로 집까지 어찌 갈 것인지 그게 더 문제였다.
딸은 자기네 집에서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조르고 졸랐다.
고집을 부렸다.
국외에선 걱정하지 않던 집안일이 국내로 들어서니 더 조급증이 몰려왔다.
절뚝거리면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또 하나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집에 도착했다.
집에 와 보니 조선시대는 그대로 엎어져 있다.
유럽으로 돌아다닌 여자만 현대여자였다.
조선시대는 덕수궁 담장에 둘러쳐진 돌처럼 단단하다.
현대여자의 여린 기력으로는 돌담을 허무는데 역부족이다.
절뚝거리든지 기어 다니든지 집안일은 온전히 내 몫이다.
여행으로 인한 가사노동의 공백은 한꺼번에 절름발이 여인네를 공박했다.
그나마 그가 나를 배려한 것은 빵을 잔뜩 사다 놓고 기다린 것.
이튿날 하루아침에만 한 끼의 식사를 빵으로 대체했다.
평일 같으면 어림도 없다.
이렇게 절뚝거리며 며칠을 지나니 다리가 말짱하다.
X레이를 찍어볼까 생각했었다.
잉크가 번지듯 멍 자국이 남았지만 아프진 않았다.
벗겨진 피부도 살포시 새 살이 덮이고 살만했다.
조선왕조 500년 그 가운데 토막에서 안동 김 씨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우당탕탕. 우당탕탕.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하루아침에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도 우리 집안에선 변함없이 안동 김 씨 행세가 가파르다.
女必從夫(여필종부) 시아버님의 가르침은 金言(금언)인 거다.
세탁기 사용법을 설명한다고 손목을 잡아끌고 갈 때만 해도 내겐 좁쌀만 한 희망은 있었다.
빨래는 내 것만 해결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와보니 그는 철저하게 분리주의를 못 박고 있다.
나는 돈만 벌어오면 됐지 절대로 집안일은 안 해.
돈 버는 것에 집중하면 됐지.
쪼잔하게 살림 따윈 상관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여전히 부동자세다.
완전한 독립이고 분업인 거다.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가 고전주의에 맞서 분리주의와 표현주의를 내 걸었다.
그렇듯 살림이라는 고전주의는 자기 영역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소소한 것들과 악수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다.
광산 김 씨와 안동 김 씨가 한 지붕 아래서 이토록 결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안동 김 씨의 세력이 가파르다 보니 지금까진 광산김 씨가 기죽고 있다.
그렇지만 두고 봐.
어느 날 안동 김 씨의 어깨가 광산 김 씨의 어깨 아래로 내려갈 날이 있을지도 몰라.
양반은 세탁기도 못 돌린다네.
양반은 가부좌 틀고 앉아 오늘도 내일도 양반 시늉만 한다네.
"에헴, 여기 시원한 물 한 잔 가져와."
"양반 나으리! 여기 물 한잔 대령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