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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May 17. 2024

우리 동네, 참 좋다

가는 4월처럼 오는 5월도 향기롭기를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장을 볼 틈이 생겼다. 시장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상가에 있는 치킨집 두 군데가 오늘따라 시끌벅적하다. 실내에 꽉 들어찬 것도 모자라 야외 식탁까지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모두 외국인들이 아닌가. 마치 유럽의 카페 거리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의 모습이 전혀 낯설게 보이지 않는 건 봄밤의 여유로움 덕분일 테다.


늦은 밤인데도 거리에는 여전히 차가 많고, 사람들로 북적댄다.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하루의 모습이 비슷하다. 한국이 좋은 이유를 묻자 ‘역동적’이라고 말하는 외국인을 본 적이 있다. 한밤중에도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늦은 밤까지 술집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신록이 움트는 4월의 밤은 초록이 내뿜는 향기로 싱그럽다. 특별히 신날 일도 없는데 공연히 들떠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바람결에 날리는 작은 꽃잎도 선물처럼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낮보다 차분해지는 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나를 향해 다가올 것만 같다. 세상을 두루 보고 싶은 온몸의 감각 세포들이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꼬리를 좇으니 도로 옆에 서 있는 푸드트럭에서 나오는 냄새였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라이더 복장을 한 젊은이와 주인아저씨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 모습이 하도 정겨워 멀리서 지켜 지켜보았다. 배달 일을 마친 청년이나 아저씨의 음식 만드는 손놀림에도 봄의 기운이 내려앉아 생동감이 있다.


"기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로변에 정차한 택시에서 한 청년이 내리며 하는 인사말이다. 앳된 얼굴에서 나오는 어른스러운 인사말에 내 마음이 훈훈해진다. 인사 한마디가 기사님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에 하루의 고된 노고가 스르르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한 아저씨가 바닥을 쓸어 공원 한 귀퉁이에 꽃잎을 수북하게 모아둔다. 도대체 이 한밤중에 왜 빗질을 하는 걸까. 사람들의 발길에 꽃잎이 짓이겨지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일까. 고운 심성을 지닌 사람의 마음 빛깔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갈 길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마트 가까이에서 딸의 팔짱을 끼고 걷는 엄마와 마주쳤다. 커다란 책가방이 여학생 대신 엄마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보나 마나 딸의 짐을 덜어주려고 마중 나온 대한민국의 대표 엄마이다. 키도 얼추 비슷한 모녀가 어찌나 다정해 보이던지 자연스레 타국에 있는 이 떠올랐다. 여기에 있더라면 나도 딸아이와 함께 꽃구경을 하며 4월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함께 있을 때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물건을 고르다 진열장에 놓인 팬케이크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딸아이가 카톡으로 보내왔던 사진 속의 팬케이크처럼 블루베리가 고명으로 얹어져 있다. 부모 그늘에서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던 아이가 제법 살림을 하는 모양이다. 학교 다니랴, 살림하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까. 독립한 건 백번 잘한 일이나 안쓰러운 마음은 늘 따라다닌다.


시장바구니를 마주 들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궁금증을 못 참는 내 눈길이 바구니 안의 바나나와 양배추, 우유 등에 꽂혔다. 요즘 양배추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는 부부인가 보다. 아무렴 어떠랴, 우리 대한민국에 건강한 젊은 부부가 많아져야 할 때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시각까지도 너른 운동장에는 농구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낮에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밤에는 몸 관리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핑계 대지 않고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챙기는 게 대견스러워 보인다. 최고의 자산이 건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와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역시 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인상 쓴 사람을 통 보지 못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언가 꿈을 꾸듯 발그레한 낯빛으로 웃음을 보내왔다. 희망찬 봄의 기운이 넉넉하게 가슴을 데워준 덕분이 아닐까. 내가 사는 이 순한 동네에 소리 없이 벙긋거리는 4월이 지고 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가는 4월처럼 오는 5월도 향기로운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치킨집을 지나쳤다. 아까 보았던 외국인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나도 슬며시 미소를 보냈다. 싱그러운 자연의 맛을 즐기는 데에 동서고금이 따로 없 오래도록 봄을 만끽하고 은 바람은 똑같은가 보다. 저들 가슴에 떨어지는 작은 꽃잎들이 한국 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수놓아지기를 바라며 나는 허공에 대고 외다.

“우리 동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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