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선여인 Jun 04. 2024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게 답

그럴 만한 사정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몇 초만 지나면 초록 신호등으로 바뀔 텐데 성급하게 차도로 발걸음을 내딛는 한 아저씨를 발견했다. 교통규칙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신호가 금방 바뀔 텐데 뭐가 저리도 급하실까?‘

  

순간,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잽싼 걸음으로 건너가다 보니 얼마 안 지나 아저씨 발걸음이랑 나란해졌다.

'멀리 가지도 못할 거면서 규칙만 어긴 꼴이 되셨네요.'

공중도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나는 속으로 비아냥댔다. 인도로 올라서려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몸을 휙 돌려다 보았다. 아저씨는 느릿하게 걷느라 아직 차도 끝자락에도 못 는 위치에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아저씨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챘다.

'아, 신호가 바뀌기 바로 전부터 서두른 이유가 있었구나.'


만일 초록 신호등으로 완전히 바뀌고 나서 건너기 시작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차도 한복판에서 자동차들이 엉켜버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갈 길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잠시 기다렸다. 아저씨가 인도로 안전하게 올라설 때까지. 이미 바뀌어버린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출발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다행히 경적을 울려대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오히려 아저씨가 안전하게 인도로 올라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졌다.


앞뒤 사정을 잘 모른 채 무작정 비난부터 퍼부으려 했던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지레짐작으로 남을 꾸짖을 뻔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누구에게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라는 걸 잠시 잊었나 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그럴 만한 사정을 인정해 준다면 조금 덜 시끄러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인도의 시성이라 불리는 타고르의 일화가 생각났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도 젊은 시절, '그럴 만한 사정'을 깜빡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는 독립운동에 힘을 쏟으며 밤낮없이 글과 관련된 작업에 몰두했다. 모든 집안일은 당연히 하인의 차지였다. 어느 날 출근 시간이 되었는데도 하인이 오지를 않자 화가 났다. 점심때쯤 되어서야 나타난 하인이 아무런 말도 없이 집안일만 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타고르는 단단히 화가 나서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거라."


그제야 하인은 지난밤 딸아이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오느라 늦었다는 고백을 한다. 좋은 일이 아니라서 주인님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며 눈물까지 뚝뚝 떨어뜨렸다. 하인이 늦게 온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주인으로서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을 묻는 게 우선이었는데 참지 못하고 화부터 낸 게 문제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지난 4월에 여고 동창들과 산행한 적이 있다. 봄의 기운으로 반짝이는 초록 숲길을 따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오래간만에 깔깔거렸다. 산을 오르는 도중 한 친구가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출근하지 않아 다음 인계받을 직원이 퇴근을 못 하고 있단다.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친구는 내일 시험을 볼 학생이라면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쩌나 연신 걱정을 했다.


평소 엄마 같은 마음으로 직원들을 잘 보살펴 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지 않은가. 업무에 차질을 빚게 한 장본인을 감싸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고가 난 것 같다며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는 친구는 화내는 법을 잊은 듯 보였다.


나보다 훨씬 전부터 '그럴 만한 사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 친구가 믿음직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며 직원 편을 드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며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장이 있는 한, 노사 간 불협화음이란 있을 수 없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대타를 구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기분은 쉽사리 밝아지지 않았다. 몇 분 후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느라 연락할 틈이 없었다는 전화가 왔다. 통화 첫마디에서 우리는 그녀의 인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내일 졸업 시험은 볼 수 있는 거야?"


친구도 나도 나이가 드니 화낼 일이 없어져 버린 것 같다. 감정을 표현하는 뇌 기능 중에서 ’화‘를 담당하는 부분이 아예 쇠퇴해 버린 건가. 남의 잘못을 보면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던 젊은 시절이 무색할 지경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들어보는 '그럴 만한 사정‘은 대부분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릴 만한 일들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 순간부터 마음은 어느새 호수가 되어 잔잔해진다.


세월이 빠르다. 나이에 따라 속도가 다르다고는 하나 쏜 화살처럼 너무 빨리 지나왔다. 속도 좀 줄여달라 아무리 떼쓰고 졸라봐야 뾰족한 수는 없다. 도대체 왜 이리 속도를 내는 건지 무심한 세월에 가끔 야속해질 때가 있지만 세월 또한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60킬로가 넘는 속도로 여기까지 데려온 분명한 이유가. 이순(耳順)이 넘으면 세상을 넓은 아량으로 보라고, 이해심이 더욱 깊어지라고. 그러니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게 답일 테다.          

작가의 이전글 오십팔만 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