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뚱인데요.
<빅 리틀 라이프>를 시작하기 6개월 전의 이야기이다. 본디 걱정이 많아 인생의 모든 시나리오를 다 써보는 나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순간을 경험하게 됐다. 말 그대로 전조 없었던 증상, 복선 없었던 반전, 신호 없었던 충격이었다. 내 인생에는 별로 드라마 같은 일이 없다며 툴툴거렸던 지난날의 나를 멱살이라도 쥐어 혼내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덤프트럭을 멀뚱히 바라보며 다리가 굳어버리는 주인공처럼 나 역시 그 파고를 온몸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좋든 싫든 나는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깨끗한 물에 잉크가 한 방울 번지기라도 하면 그 어떤 짓을 해도 투명했던 본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선,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거짓말을 할 자신도 없었다. 변색되어버린 스스로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조금씩은 거짓말이 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의아함을 사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침묵도 거짓말이 될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직장동료들과 둘러앉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나눌 때마다, “사실 내 일상은 그렇게 나이스하지 않아”라고 말 못하고 침묵해야했던 시간이 그랬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집에 돌아오면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곤 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꼴이 한심해서, 내 처지가 원망스러워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버렸다는 죄책감이 뒤섞여서 구역질이 났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찾아오면 그제야 아무도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매번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가끔은 코피도 났다. 하얗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워서 미련하게도 단 한 번도 건강을 염려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몸이 힘들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내가 마주한 수많은 얼굴들을 전부 속이는 건 아닐까 하는 괴로움도 있었다. 특히 나를 높게 사는 이들의 과분한 칭찬을 들을 때에 그랬다. “아니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이상적인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랐다거나, 부족함 없이 큰 사람이 아닌데요. 저는 밤마다 변기통에 매달려 헛구역질을 하는데요. 심장이 너무 쿵쿵 뛰어서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인데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나보다 큰지 작은지 가늠하며 살아가는 죄 많은 인간인데요”라고 조목조목 반박해 상대방의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못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의, 감사해야 마땅하고 과분한 그 기대를 잘근잘근 밟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건 우습게도 만화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아뇨, 뚱인데요?”라는 장면을 본 후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은 여러 가지 밈을 만든 걸로도 유명한데, 그 중 가장 널리 퍼진 밈이 바로 이 “아뇨, 뚱인데요?”라는 장면이다. 상황과 대사는 대충 이렇다.
집게리아 라는 레스토랑 카운터에서 일하는 뚱이.레스토랑의 전화벨이 울린다.
- 손님1: 집게리아지요?
- 뚱이: 아뇨, 뚱인데요?
뚱이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전화벨이 또 울리고 뚱이가 전화를 받는다.
- 손님2: 거기 집게리아 맞죠?
- 뚱이: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침착해하며) 아니요, 전 뚱이예요!
뚱이가 아까보다 살짝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 손님3 : 집게리아입니까?
뚱이: (소리를 지르며) 아니요! 뚱이라니까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난 집게리아가 아니야!
그러자 요리사인 스폰지밥이 일깨워준다.
- 스폰지밥: 뚱아, 우리 가게 이름이잖아.
- 뚱이: 뭐? (깨닫고 자책하며) 이런 멍청이가 있나!
여기서 ‘뚱이’는 그냥 멍청이다. (물론 ‘뚱이’는 가게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함부로 삭제하지 않고 존재를 지켜가는, 놀라운 철학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여기서 그런 얘기는 논외로 하자.) ‘집게리아’를 원해서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한테는, 아무리 전화받은 이가 ‘뚱이’였어도 ‘집게리아’라고 소개해야지, ‘뚱이’라고 굳이 자기를 소개해서 무엇하나.
이 장면에서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훌륭한 장도수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장도수를 보여주면 되지, 구태여 부족하고 구질구질한 장도수를 소개해봐야 뭐하냐는 말이다. 그것도 다 내 이기적인 욕심이다.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심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모두에게 이해받는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바람이다.
썩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 집게리아죠?’ 하면 그냥 ‘예, 맞습니다. 집게리아입니다.’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아껴둔 마음의 힘으로는 정말로 이해받고 싶은 몇몇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 전부 털어놓으면 될 일이었다. 커다랗고 흐리멍덩한 다수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하자, 조그마하지만 선명한 몇몇이 손에 잡혔다. 어차피 그들만이 진짜 내 것이었다.
‘집게리아’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게 사람들을 기만하는 속임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겸허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간 아무도 내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타인의 삶에 관한 한 나의 어떤 확신도 오만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함부로 아무것도 짐작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도.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낯선 이들이 내게 찾아와 ‘집게리아’를 찾는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뚱이’가 아니라 ‘집게리아’가 된다. 대신에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꼭 만난다. 그들도 가끔은 내게 ‘집게리아’냐고 묻는다. 나는 용기와 힘을 그러모아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나는 ‘뚱이’라고 설명하고 주장하고 마침내 이해받는다. ‘뚱이’는 이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와도 구역질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