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게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지식을 보유 보전 하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크고 작은 혹은 소소한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기록하는 것 말이다. 사실 전자의 말이나 후자나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식서 역시 내가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 후대에 남겨둠으로써 그 기록을 배움으로 예측하게 되고 조금은 시행착오를 거칠지언정 많은 실수를 줄이며 경험을 토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말이다.
얼마 전 은퇴를 준비하는 은퇴자와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그 은퇴자로부터 어제는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이미 자신의 서재를 정리하며 많은 책을 주셨는데 또 주셨다. 다름 아닌 1987년에 쓰신 목회학 박사 논문집이었다. 겉표지부터가 "나 논문이요"하는 포스와 함께 세월의 흔적으로 바랜 누런 한 종이책이었다. 주시면서 뭔가 수줍은 듯 내미시며 "책 한 권 선물해 줄까요?" 하신다. 제주에서는 최초 논문집 이라시며 주셨다.
나는 가끔 은퇴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책을 한 권 써보시면 어떨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나보다 훨씬 산 경험이 풍부하신 아버지뻘의 은퇴자께 그런 제안을 했다. 목사로서 40여 년을 지내셨고, 그 이후로 제주의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행사를 크게 치렀어야 할 돈으로 제주땅에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소아암 재단을 만들어 15년 넘게 잘 쌓아 올려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것도 무보수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111명의 환아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했다.
어쩌면 뭐 그 정도 목회생활을 해냈고, 그 안에서 재단 하나 운영하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옆에서 지켜본 나의 개인적인 견해라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것이다. 또 함께 시작을 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 역시 적지 않은 돈을 후원에 참여하시는 것도 어떤 힘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간에 근무하면서 '뭐.. 그랬나 보다'하며 깊은 생각이 없었다가, 진짜 은퇴를 위해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며 참 훌륭한 분이구나 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성경 속 노아의 모습이 떠 올랐는지 모른다. 120년 동안 '아라랏산' 당대에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큰 배를 지으라는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 유명한 '노아의 방주'를 지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120년을 산을 오르며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행동을 실천하며 어쩌면 어려움은 사람들의 시선도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뭐 하러 지금 산을 오르고 있을까? 조롱하는 저 사람들의 말이 더 크게 들렸을 날도 있었을 테지만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던 노아의 방주는 결국 문이 닫히고 40일의 주야로 비를 맞이했다. 노아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40년 120년 400년이라는 년수가 자주 등장한다.
사실 너무나 쉽게 읽어 내려가는 성경 속 연수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광야에서의 40년이 어느 날은 징글맞게도 힘겹게 느껴지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의미는 이제야 내 나이 40대 후반을 살아 봤기에 그 연수가 느껴지는 것이다. 거기에 400년의 애굽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아마 '나' 라면 "앓느니 죽어 버리자"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은퇴자의 묵묵한 행동이 노아의 모습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떠날 때가 되니 그동안 모금했던 후원금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몸 담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더욱 잘 정리해서 인수인계하려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야 직원이니 월급이 따박 따박 나오지만 판공비도 없이 내 것처럼 일하고 마지막 떠날 때는 내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는 그 모습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자 '헌신'의 모습이 자리를 내어주는 참 리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날 해왔던 것을 정리하며 회고하는 모습 속 말씀은 참 어른이구나 싶었다.
사실 난 은퇴자의 정치성향이나 나와 다른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16년여의 시간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18년 정도를 그저 무보수로 헌신 하신걸 보니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 간의 일들을 기록을 책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퇴자는 손사래를 치시며 "뭘 책을 쓰나"하셨지만 그 이후로는 본인이 쓰신 다른 분들의 책의 추천사를 내게 넌지시 보여 주시며 말씀하시곤 하신다. "은근슬쩍 이거 내가 쓴 건데.." 하시면 건네신다.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은 한 글자도 오타도 인정하실 수 없는 은퇴자의 젠틀한 성품과 닮아 있는 매사의 글마다 정갈하신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글을 읽을 때마다 "정말 잘 쓰셨네요"하며 마음 가득 긍정의 표현을 드리곤 한다.
그 논문집을 드문 드문 보면서 제주의 역사가 있었다. 제주에 200년의 출혼 금지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조 때부터 순조말까지 육지인 외부와의 결혼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분이 걸어온 은퇴자의 역사가 기록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글쓰기라는 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의 '희로애락'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고 읽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은퇴자를 통해 또 배우게 되었다.
과연 은퇴자는 책을 쓰실까?
나는 가끔 마치 어려운 상사분 이신대도 넌지시 건네본다.
"저는 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보면서도 참 감동이었고 배울 점이 많았거든요"하며..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 작가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은퇴자는 말없이 "허허"웃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