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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뷰 May 12. 2024

영화 <시>를 보고서


오늘은 이창동의 영화 <시>를 봤다.


한동안 현생에 치여 영화를 보지 못했었다. 지난달 아트하우스모모에서 봤던 <로봇 드림>이 마지막 영화였다. 집에서는 영화를 잘 보지 않는데, 집에 있으면 해야할 잡일이 계속 생각나서 집중이 안되기 때문이다.


비오는 연남, 스페이스클라우드로 빌린 모임공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관람하였다. 창 밖에 비는 내리고 어둑해질 때라 그런지, 영화는 한층 더 서글프게 아름다웠다.




이 영화를 아주 나이브하게 설명하자면, 손주를 맡아 키우는 할머니가 시를 써보고자 노력하는 내용이다. 그러던 중 손자가 저지른 일때문에 이곳저곳 불려다니고, 직접 찾아가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노트를 꺼내 떠오르는 시상을 잡아보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시는 영화이자, 예술이다.

양미자 할머니는 감독 이창동이자, 이런 영화를 굳이 찾아보는 관객들이자, 세상에서 일어나는 서글픈 일들에 관심을 가질 줄 알고,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면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의 세계는 고통스러운 순간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쉬이 덮어버리고, 빨리 털어내버리고픈 해프닝일테지만,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거대한 시상이자, 영감이다.


어떻게 시를 써야할까. 예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데 들인 힘보다 그것을 구상하는 데 들인 힘이 훨씬 많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예술이다. 당장 현대미술 작품만 보아도,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제작 자체가 까다로운지 아닌지보다, 작품이 품고 있는 역사와 이야기에서 결정된다. 시를 쓰고자 고군분투했던 양미자의 시는 결말에 짧게 지나갔지만, 그녀가 시를 적게 된 과정이 영화라는 또다른 예술작품이 되는 것을 보며, (이게 실제가 아닌 영화임에도) 오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어느샌가 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대학수학시험과 같은 시험기출문제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시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시를 배운다고 하면, 다들 '시인이 될거냐'고 되묻는다. 시를 배우는 것의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시가 죽었다고 해서, 시를 배우거나 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그냥 그것을 하는 것이다. 무언가 대단한 게 되려는 게 아니라, 좋으니까 하는 것들 중 하나다. 마치 주말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사소한 일이 삶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인 것처럼. 예술은 사람을 살게 한다.



영화가 던지는 또다른 화두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그 주변인들',

이 세 인물의 관계성이다.

특히나 한국에서 이런 주제는 예민하다. 우리는 늘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피해자다움', '가해자다움' 이런 단어도 다 어떻게해서든 사건의 발단을 찾고자하는 무례한 궁금증때문이다. 그렇다고 원인을 찾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애초에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었으면 하는 마음. 나와 동일시하기에 나는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마음. 이런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피해자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피해자가 됐을까?

가해자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가해자로 컸을까?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면, 범죄율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특히 그들의 주변인로 시선을 옮기면, 그곳은 더 처참하다. 그들은 어떤 이미지도 요구받지 못한 채, 그 프레임 안으로 밀어넣어진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모두 좋음과 나쁨 중간에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을 뿐.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이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까? 한가지 쉬운 해결책은 있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어떤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할 줄 아는 것.

'별일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진 않은지, 조금이라도 더 헤아려보는 것. 어쩌면 아주 단순해서 굳이 사람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 그것이 가장 쉽고 가장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시 쓰는 법을 배워야하는 사람들은 시의 시옷도 관심이 없다. 시를 쓸 줄 아는 사람만이 시를 배우고자 한다.

어찌되었든 이 영화가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선택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각 잡고 글을 쓰려다보니, 글을 안 쓰게 되어서 이번에는 아주 나이브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여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나중에 조금씩 수정하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 들었던 당장의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했다.


이로써 나는 이창동 감독의 공식 필모그래피에 올라와 있는 모든 영화를 다 봤다. 이창동 영화 중 TOP3를 꼽자면, 1.오아시스 2.밀양 3.박하사탕. 이렇게 세 영화이다. 시를 보고 순위가 바뀔까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다.


여담으로.

지난달 갔었던 대만여행에서, 영화로 가득 꾸며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있다.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들의 포스터도 있길래, 보통 영화팬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사장님께 질문을 던졌다.


"한국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무엇인가요?"  


그때 그가 뽑았던 한국영화가 이창동의 <시>였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면, <시>를 봐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도 친구들도 이 영화를 보고 싶었었다고 말해주어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했었다. 이런 행복때문에, 내가 영화를 계속 보나보다. 그리고 이렇게 쓰나보다.

대만 카페에서 찍었던 사진들. 찐영화덕후의 카페st




오늘의 영화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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