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경면 청수리 - 산양리
다시, 제주의 어느 날
여행이 끝났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지만, 더 많은 무언가를 담았기에 이 일상에서의 괴리감을 지울 수 없다. 맥주캔을 쥐고 멍하니 채널을 돌리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평소 하얗고 자그마해 괜히 눈길이 가던 ‘아이유’가 제주의 작은 숲을 소개하고 있다. "청수 곶자왈" 귀에 익은 지명과 눈에 익은 풍경에 반가운 마음이 먼저다. 정확히 그곳은 아니었으나 여행 첫날 머물던 부근이다. 따뜻한 목소리의 내레이션과 배경음악에 목이 탈 때쯤, 푸른 나무와 반딧불은 나를 미소 짓게 하다 이내 눈물 짓게 한다. 다시, 나를 제주로 데려다준다.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아침, 오늘은 조금 다르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어디든 가야 하겠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는데 하늘이 눈부시다. ‘나, 비행기를 탈 거야!’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다. 해외를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국내선을 누른다. 나를 가슴 뛰게 할 곳, 제주다.
하늘을 내려다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땅에 발 붙이고 서 바라본 것조차 기억할 수 없다. 그게 뭐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얼마나 수고로운 일이라고. 그래서 더 소원해졌는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고 힘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숨 쉬는 걸 의식하지 않듯이 하늘을 바라봄은 특별한 일이 아닌 게 된 거다. 어느 순간부터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작은 기척에 놀라 거리를 가늠하고, 행여 나에게 피해라도 줄까 싶으면 미간을 찌푸리는 일에만 골몰했다. 잠시 잊어볼까. 그래, 무작정 떠나온 것처럼 무작정 잊어보자. 원래 없던 것처럼, 들숨에 하늘을 담고 날숨에 모든 관계를 잊어보자.
제주 공항에 도착한 것은 평일 오후 4시 무렵. 강렬하게 부서지는 섬의 햇살은 꽤나 눈부시다. 여기저기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눈에 띄는 순간 '아차' 싶다. 하지만 괜찮다. 아침에 표를 예매하고 가방을 챙긴 순간부터 이 정도 부족함이야 예상한 것 아닌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집에 다녀올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생긋 웃어본다. 1시간 남짓 걸리는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숙소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때다. 낯선 곳이 주는 설렘은 숙소 냉장고에 들어있던 레토르트 떡볶이를 보는 순간 허기에 지고 만다. 뭘 먹어야 하나. 뭐든, 기본이 걸어 20분 이상이다. 이도 좋다. 돈 주고 마신다는 맑은 공기,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하는 걷기가 한 데 있으니 완벽한 산책 코스일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된다.
도착지까지 약 2km라는 지도 안내에, 일단 호기롭게 나서본다. 차 하나 지나지 않는 2차선 도로를 걷다 보니 '산양리 곶자왈'이라는 표지가 눈길을 잡는다. 산양리에 있는 곶자왈. 곶자왈은 숲을 의미하는 '곶'과 나무와 덩굴 등이 엉클어 수풀을 이루는, 즉 덤불을 의미하는 '자왈'이 합쳐진 제주 고유어다. 이 지대는 북쪽과 남쪽의 식물이 공존하여 숲을 이루는 게 특징인데, 주로 제주도의 동서부 지역에 분포한다. 동쪽에서부터 구좌-성산 지대, 조천 지대, 교래-한남 지대, 애월 지대 그리고 한경-안덕 지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는 지금, 한경-안덕이다.
이러나저러나 여기까지 와서 가식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 솔직히 이곳이 어디에 속하든, 이름의 유래가 어찌 되든 별 관심은 없다. - 적어도 이날까지는 정말이다! - 이곳의 이름보다 수식 어구에 마음을 뺏겼다는 게 맞다. 반딧불이 춤을 추는 곳이라니. 가슴이 간지럽다. 사실, 동화 속에만 살 것 같은 반딧불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꽤 충격이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경악한 나를 보고 깔깔대던 친구의 짓궂은 모습이 기억난다. 예고 없이 진실을 마주한 나의 상처만큼 깊이 새겨진 모양이다. 적어도 그 사랑스러운 눈빛은 충격이 아닐진대 잘 잊히지가 않는다.
술을 예닐곱 잔쯤 비우고 조용한 시골길을 걷는다. 아주 가까이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걷는 내내 주위는 꼭 한밤중의 냉장고다. 보이는 거라곤 설익은 귤이 달린 과수원과 종종 보이는 집들의 노란 야외 조명, 그리고 낯선 이의 등장에 짖어대는 개뿐이지만 자꾸만 눈이 간다. 갓 튀긴 치킨이 있는 것도, 육즙이 가득한 만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익을 대로 익어버린 김치와 관상용이 되어가는 나물 반찬 따위만 있을 게 빤하지만, 요 문을 열어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다. 눈길을 주지 않고서는 못 버티는 거다.
중간중간 가로등도 꺼진 깜깜한 길가에 공포를 느낄 무렵 작은 요정이 나타난다. 적당히 취기도 있고 아무런 각오도 되어 있지 않던 탓에 사고가 정지 상태다. 예쁘다. 저게 뭐지? 아. 설마?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반딧불이다. 반가움에 "꺄-!" 소리를 지르지만 이내 비명으로 바뀐다. 반딧불은 두 손에 쥐고 잠들고 싶을 만큼 예쁘지만 반딧불이까지 사랑하기엔 난 파브르와 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닿고 싶지만 닿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가며 춤을 춘다. 한라산이 혈관을 타고 몸을 데운다. 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게 반딧불이와 제주의 첫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