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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Apr 08. 2022

비움의 의미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어

아내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했었다.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아기들을 재우고 난 뒤부터, 미친 듯이 물건을 버리는 아내를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녀는 "물건이 너무 많아"중얼 거리곤 했는데 그 모습이 과호흡으로 숨을 헐떡이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체 미니멀리즘이 뭐지? 의문을 가진 뒤 탐색해 보니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미국 다큐를 통해 접한 미니멀리스트들은 삶의 공간마저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집이나 옷, 물건 따위의 물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이 맺는 관계에 집중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었다.

아내가 수시로 들여다보는 미니멀리즘 카페를 엿보면 형태가 사뭇 다르다.

그들에겐 소품이 무척 중요해 보였다.

브랜드 <무인양품>스러운 이미지의 하얗고 깔끔한 물건들이 미니멀리즘의 기본 아이템이다.

세제나 샴푸 바디샤워 겔 따위도 공장에서 출시된 그대로 쓰지 않고 하얗고 깨끗한 통을 새로 구매해서 그곳에 옮겨 담는 귀찮음을 무릅쓴다.

갖가지 종류의 옷걸이를 모두 버리고 일체감이 느껴지는 나무 재질의 옷걸이를 새로 사서 옷을 정리한다.

그들에게 미니멀리즘이란 '비움'보다는 깨끗하고 예쁜 형태로 '전환'이나 새로운 형태로 '채움' 혹은   온갖 "난잡한 디자인들을 비우는것"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또 다른 형태의 미니멀리즘도 있다.

'더 가지는 것'을 포기하거나 '차라리 가지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욕심을 비우는것이다.


20대 중후반 즈음 어느 날 맞았던 절망의 밤이 생각났다.

나는 흡사 담벼락 아래 쓰레기통 틈 사이에 사는 굶주린 생쥐였다.

더러운 뒷골목과 하수구 사이를 뽈뽈거리며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모아 쌓아 놓으면 지나가던 개가 발로 툭툭  쳐서 와르르 흩어버리고.. 또 모아 놓으면 한낱 산들바람에 휙 다 날아가버리고, 또 모아 놓으니 예기치 않게 소나기가 내려 다 떠내려 가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횡령, 체불, 인대 손상, 힘줄 절단, 교통사고 등..

10원 한 장 아껴가며 살아봤자 삶은 내 어설픈 계획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돈 한 푼 아껴 보겠다고 공사장에서 얻은 구조목으 설피 만든 책상과 누군가가 버려 놓은 걸 주워 온 가구들이..어느밤 참 아프게 다가왔다.

한낱 사물에 불과한 그 물건들에 수많은 기억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앉아 한참을 넋 놓고 그 기억들을 더듬어 보다가 술 취한 사람처럼 일어났고 아픈 몸을 절뚝거리며 그 물건들을 아침해 뜰 때까지 다 내다 버렸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행한 '비움'이었다.

비움의 효능은 굉장했다.

쏟아져 내리는 아침해를 맞으며 텅 빈 방안에 서서 마음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한낱 사물을 버렸을 뿐인데 구질구질한 내 모습과 초라한 시간들, 덧없던 몸부림과 노력들에 대한 분노 따위도 모두 함께 내다 버린 것만 같았다.

사물을 버렸을 뿐인데 영혼이 씻긴 느낌이었.

그렇게 나의 일부였던 망할 짐들을 비우고 나자 더 나은 채움도 행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더 나은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비우고자 생각했다.

어찌 보면 포기를 한 셈이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비움의 가치를  살았다.

세월을 격하고  정신없이 물건을 버리는  아내의 뒷등에서 그 시절의 기억이 연상되어 왠지 조금은 슬펐다.

아내의 비움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나는 묻지 못했고 또 끝내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짐 속에서 허덕거리다가 비움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간헐적으로 "짐이 너무 많아 "탄식할  뿐이었다

육아와 함께 그 바통도 내가 이어받아 아내가 비우지 못한 것들을 비웠다.

사물은  한낱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억에 따라 사물을 분류하여 싫은 기억, 싫어진 기억을 버리고 좋은 기억, 행복한 기억은 정제했다.

여전히 소유는 나를 지배하고 또 나를 규정하고 있다.


한때 나는 정말 가지고 싶지 않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  또 외적인 물질은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가지지 못한자가 말하는  무소유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점이 되고 나서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자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란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행복은 소비에 의해 좌우되고, 인간의 가치는 소비능력의 크기에 의해 매겨지는것만 같다.

소비와 소유가 사람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결정한다.

모든 미디어는 더 비싼 것을, 더 가지라고 외친다.

물건을 오래 쓰거나 고쳐 쓰는 것은 어딘가 궁색한 일인것만 같다.

내가 소유한 물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개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타인이 가진 새로운 물건들 사이에서 상대적 불행을 느끼면서 오히려 가지지 않고 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본질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는 왜 ~ 을 행 하는가? 질문을 던져본다.

사실 잘 모른다.아니 알아도 인지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극을 따라 욕망에 몸을 기는것이 편하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와 실험에 의하면(ex : 뇌량 절단 실험).

인간은 우뇌가 인지하지 못한 것을 좌뇌가 경험에 의해 각인된, <인지 범위 안의 것>으로 정의 내린다.

아니, 뇌신경과학자 호바스의 연구에 의하면 좌뇌는 우뇌보다 앞서서 예측을 수행한다.

모르는 것을 인지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판단해버린다고 한다.

모른다는 고통이나 두려움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치환하여 편안함이나 쾌락을 느끼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쩌면 소유와 소비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삶의 목적이란 본질을 몰라서 생긴 정신적 <균열>이나 <공동>알 수 있는 것으로 쉽게 채우려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음식에서도 그런 장면은 흔하다.

msg가 먼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msg의 진짜 문제점은 근거 없는 유해함이나 화학조미료라는 모함이 아니라 보조재로써의 본질을  벗어나 주제넘게 주재료가  되어, 영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영양을 배제하고 자극과 맛만 채운다는 것이다.

고작 한 그릇 밥에 30가지가 넘는 찬이 나오는 한정식, 밥보다 두꺼운 회를 얹은 초밥. 꼬끄 2개보다 두꺼운 필링의 뚱카롱. 도우보다 두꺼운 치즈와 온갖 토핑이 올라간 피자, 먹기도 힘들게 높이 쌓아 올린 햄버거, 빵이 아니라 필링을 감싼 껍질인 것만 같은  도넛이나 빵과 같은 음식들도 그 주객전도의 연장선에 있다.

이 모든 것들 어쩌면..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음식의 조화나, 음식의 목적이나 본질과 같은 난해한 가치를

누구나 알기 쉬운 <>이라는 직관적인 가치로 갈음하려는 의도.

세상의 흐름과, 소유보다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트렌드에는 맞지만 아쉽게도 깊이와 이해는, 양과 경험 횟수로 치환된다.


어쩌면 미니멀리즘은 본질을 인지하기 위한 도구다.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은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군더더기들을 모두 빼서 본질만 남기고 정제된 것들을 쌓아 올려 내  삶과 관계의 질을 높여가고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삶의 태도.

내가 지향하고 싶은 미니멀리즘은 그런 형태다.

이 유용한 도구는 음식에도 적용이 된다.

양식에서 맛의 핵심이란 겹겹이 쌓인"켜"에 있다.

수평적으로 더하는 난잡함 아니라 불필요한 것은 빼고  필요한 것은 더하여 수직적인 형태로 중첩시키는 것이다.

과정과 재료를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잡한 과정을 통해 맛과 영양을 정제하는 셈이다.

내가 생각하는 음식의 미니멀리즘이란 그런 형태다.

그런 음식이 먹고 싶다.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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