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교의 리처드 랭엄 교수는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발견하고 요리를 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식(火食)이 에너지소비의 효율성을 높여 치아와 교근과 내장의 길이를 축소시켰고 높아진 효율성만큼 뇌의 크기를 늘리게 되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은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고 물질의 속성을 변형시키고 소유한 종의 형태와 운명마저 바꾸는 강력한 에너지다.
강한 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더 많은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더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과 같다.
즉, 자연계에서 요리를 하는 유일한 종으로써 인간만이 소유하는 공간인 주방에서 강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 즉 쾌락을-맛있는 음식이 주는- 향유할 자격을 지녔다는 뜻이다.
강한 화력이란 센 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료의 온도, 조리기구의 개폐여부와 같은 외부요인에 의해 온도를 빼앗기지 않는 힘이기도 하다.
모든 힘이 그러하듯 열은 얻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서 열을 쉽게 잃어버린다면 요리는 더 많은 화학반응을 일으킬 기회를 상실하여 맛이 없어진다.
강한 열을 기반으로 하는 음식을 조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열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열을 쉽게 잃는다면 잃어버린 열을 보충하는데 더 많은 자원을(시간과 열원) 소비하게 된다.
열악한 조건이 열등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가난의 세습이 주방에서 재현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문명 유지의 핵심이었던 쌀 문화권에서 100도 이상의 온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카레나 국, 탕 혹은 아예 열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발효음식이 발전한 것 역시, 강한 불을 요하는 음식은비효율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높은 온도를 필요치 않는 쌀 문화권의 음식과는 달리 피자나 커피 같은 밀문화권 음식은 강한 화력을 필요로 한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양식조리의 영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장인일수록 좋은 재료는 좋은 도구와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로스터나 요리사의 역할은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는 것.
좋은 재료를 좋은 조건들과 연결하고 나쁜 재료와 나쁜 조건을 사전에 배제하는 것이다.
작은 가스버너를 열원으로 하는 몇백만 원대의 저가 로스터와, 독자적으로 설계된 열원을 지닌 수천만 원대의 로스터기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의 격차는 크다.
(수용할 수 있는 원두 중량의 차이와 생산성 차이에 의해 벌어질 사업의 격차 역시 마찬가지다.)
250도가 최대 온도인 가정용 빌트인 오븐에서 구운 마르고 딱딱해진 피자와 500도의 열원을 가자 화덕에서 구운 피자 역시 차이가 크다.
육아를 시작하고 난 뒤에야 늘 냄비 보관통으로만 쓰던 빌트인 오븐을 첨으로 닦아서 쓰게 되었다.
250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가정용 오븐의 화력이 너무 아쉬워서 자작 오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무렵 즈음 난생 첫 캠핑을 갔고.. 모닥불을 지피면서 장작을 소량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이젠 당연한 사실을 첨으로 알게 되자 앞선 생각들이 짬뽕이 되더니..
굳이 캠핑 가서 바다를 보며 피자를 구워 보겠다는 이상한 집념이 생겼다.
몹쓸 ㅈㄹ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다 20분이면 500도까지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포터블 오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 그건 정말 꿈의 개인용 오븐이었다..
"이 오븐을 사고 싶어서 잠이 안 와요"라는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나도 잠이 안 왔다.
구조가 너무 단순해서 펠릿을 열원으로 한다면 철공소에 의뢰해서 한 2-30만 원으로 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면 기분이 안 좋을 것만 같았다.
비용이냐.. 기분이냐..
며칠 고민하다가 나 답지 않게 기분을 선택했다.
수개월 뒤 마침내 포터블 오븐이 도착했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3여년간 수백 판의 피자를 집에서 구워 왔다.
내가 가진 포터블 오븐의 구조는 뒤쪽의 열기가 천장을 따라 빠져 나가면서 그 열이 바닥의 돌판을 가열하는 원리인데 산소는 또 바닥 쪽으로 유입된다.
화덕의 구조를 축소시켜 놓은 셈인데 화덕과 달리 돌판 하단에는 보온 공간이 없어서 화덕에 비하면 장난감처럼 작은데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한다.
업장의 오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지금 이 순간도 전국의 수많은 피자샵들은 찰나의 조리를 위해 하루 종일 수백 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오븐 가동률이 높다고 구조적인 비효율성이 낮아지지 않는다.
강한 화력을 유지하는 비효율을 감당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그런데 서양의 음식은 대개 도구뿐만 아니라 재료와 결과물 역시 비효율적이다.
예부터 서양인들의 주식인 고기와 빵 역시 낭비와 비효율이 극대화된 음식들이었다.
빵은 엄밀히 인간이 성취한 최초의 화학적 결과물인데, 밀의 출현 이후 고대 서양인들의 주식이었던 귀리, 기장, 보리 따위는 천민의 곡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부풀어 오르는 빵은 밀로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효율적이지만 끝없이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쌀과 달리, 밀은 일단 씨를 뿌리면 인간의 손길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작제를 도입하기 전까진 수확하면 2-3년은 땅을 묵혀두어야 했기에 계속 새로운 땅을 필요로 해서 땅의 사용도 비효율적이었다.
그런데 재료인 밀의 생산만큼 결과물인 빵의 생산과정도 비효율적이다.
그릇과 작은 화롯불만 있으면 물만 부어 잠시만 끓여도 먹을 수 있는 1쌀과는 달리, 밀은 주식인 빵이 되기 위해 많은과정을 거쳐야 했다.
먼저 곡식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제분소가 필요했다.
또 그 빵을 굽기 위해 큰 오븐을 설치할 큰 공간과 높은 온도를 위한 많은 연료가 필요로 했다.
완전식품인 쌀과 달리 밀농사를 짓는 인간은 밀만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었기에
부족한 영양소를 채우기 위해 고기와 유제품을 섭취해야만 했는데
고기와 유제품 역시 비효율의 상징이었다.
동일한 영양분을 생산하기 위해 쓰는 에너지가 식물의 5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허나 높은 온도를 필요로 하는 밀 덕분에 산은 늘 헐벗었고 이는 동물의 개체수를 줄이는 악순환을 야기하여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려야 했고,
혹사병이 돌아 유럽 인구의 1/3이 죽고 나서야 서양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양인들의 음식은 모두 제한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미약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그탓에직접 구하는 것보단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더 쉽고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진리를 불가피하게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되고 일찍이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리스인들은 집정관 솔론이 개혁법을 완성하기 전 수백 년간 '땀을 흘리는 노동'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도 그의 작품 안에서 농기구는 미개한 것이고 항해도구는 신성한 것으로 묘사한다.
발칸반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유목민들로 살아온 그들은풀이 자란 곳을 따라 이동하던 삶의 방식을, 해안에 거주하며 해적질, 전쟁, 약탈, 교역같은 삶의 방식으로 전환시켰고, 그렇게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타인이 대신 땀과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생긴 여유를 바탕으로 철학, 수학, 민주주의 같은 것들을 발전시키고 꽃 피울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서양인들은 보다 약한 국가들을 끝없이 착취하고 수탈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피지배계층'에서 '제국의 국민'으로 신분이 격상된 뒤에야 비로소, 비효율성의 집합체인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값싼 노동력, 아동들의 노동력 심지어 현대판 노예까지 동원된 착취로 생산되는 설탕, 카카오, 커피 등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식 디저트들도 비효율성의 집합이다.
강한 화력이라는 주방의 권력은 일련의 비효율성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기반으로 유지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양식과 서양식 디저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국적인 맛을 즐기는 것 이외에도 그 음식들의 속성 자체가 숱한 '다른 것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