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때문에 싸웠다

by 찐테크


요즘 예비 신랑과 돈 문제로 갈등이 잦다. 경제 관념과 소비 습관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디테일로 들어가니 다른 것이 참 많은 우리였다. 여태 늘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살던 나는 결혼준비를 하면서 쉴새없이 돈이 새어나가는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 남자친구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돈을 써보겠냐며 신나있고 결혼준비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까지 은근슬쩍 사려고 한다.



처음 결혼 준비를 할 때는 딱히 하는 것도 없었고 계약금 정도만 넣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돈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이제 3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은 청첩장 같이 자잘한 것들부터 스드메 잔금, 가구 구매 등등 작게는 몇 십만원, 많게는 몇 백만원이 훅훅 빠져나가고 있다. 2월에는 연말정산으로 400만원도 넘게 뜯기면서 월급이 0원이었던 터라 이런 상황에서 매달 몇백만원씩 계속 지출이 발생하는게 나에겐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특히 가전 구매로 엄청나게 많은 갈등이 있었다. 신혼집은 잠시 살다가 하반기에 이사를 계획하고 있는지라 대형 가전 구매는 뒤로 미뤄둔 상태이다. 그렇기에 나는 가전은 관심도 갖지 않는데 남자친구는 혼자서 열심히 찾아오더니 눈높이가 하늘 꼭대기로 치솟았다. 안그래도 집이 좁아터져 죽겠는데 남자친구는 거실과 방에 각각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를 1대씩 놔야겠다고 우겨댔다. 그것도 아주 비싼걸로. 남자친구가 사고 싶어하는 것들로 산다면 최소 200 이상이었다.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금 집에 침대도 없어서 당장 침대부터 사야하는데 대체 왜 필수 가전도 아닌 공청기랑 가습기를 사겠다고, 그것도 그렇게 비싼걸 사겠다고 하는걸까. 그 놈의 가습기 때문에 얼마나 유치하게 싸워댔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타협해서 가습기 1대만 적당한 선에서 구매했다. 공기청정기도 사고 싶다는건 못들은 척 했다.



이런 와중에 남자친구는 계속해서 결혼 전에 제주도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며 졸라댔다. 아니 세상에, 우리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써야 되는 돈이 몇천만원이데 대체 왜 불필요하게 여행까지 가면서 돈을 못 써서 안달인거야? 신혼여행도 본인 성화에 결혼식 날짜까지 바꿔가면서 2주씩 길게 다녀오고 천만원 넘게 쓰는데 도대체간에 왜 그 전에 여행을 또 가고 싶어하는거야?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남자친구는 제주도 여행 가는데 돈 뭐 얼마나 든다고, 너랑 나랑 그 돈이 없어서 여행도 못고 가습기도 못사냐며 성을 냈다. 맞는 말이긴 하다. 뭐 돈이 없어서 못 가는건 아니다. 어차피 결혼 비용으로 몇천만원씩 쓰는데 제주도 여행으로 돈 300만원 더 쓰고 가습기 산다고 몇 십만원 더 쓰는건 티도 안난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이면 우리 침대 좋은거 살 수 있는데? 그 돈이면 냉장고 살 수 있는데? 우리 사야하는게 넘쳐나는데 왜 필요한데 돈 쓸 생각은 안하고 계속 불필요한 지출을 하려고만 하는걸까 화가 났다.



남자친구는 내가 너무 팍팍하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철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돈 때문에 계속 삐그덕거렸다. 그리고 얼마 전 내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로 무얼 갖고 싶냐는 남자친구의 말에 내가 먼저 든 생각은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필요한거 사는데 돈이나 보태든가... 아님 그냥 돈 아끼게 스킵하고 넘어가면 안되나였다. 이런 내 말을 들은 남자친구는 펄쩍 뛰면서 왜 그렇게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아끼려고만 하냐며 결혼 전에 사고 싶고 쓰고 싶은거 있으면 제발 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문득 내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돈을 버는걸까?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아두는 것처럼 그렇게 쌓아두기만 하려고 버는건 절대 아닌데, 쓸 땐 쓰고 살려고 돈도 벌고 모으는건데 왜 나는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돈을 쓰는게 이렇게 스트레스인걸까? 물건이 주는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부질없음을 느껴서인 것 같기도 하고, 평생 이렇게 많은 돈을 써본 적이 없는데 내가 아등바등 열심히 모아온 돈을 이렇게 한 순간에 써버린다는게 화가 나서인 것 같기도 하다.



명쾌한 답은 모르겠지만 남자친구와의 갈등 덕분에 내가 생각보다 모아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과 내가 엄청나게 소비 통제적인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돈을 버는 이유, 소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습기가 도착했던 날 남자친구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사지 말라고 화를 냈을까 머쓱해졌다.



우린 어쩌면 계속 돈 때문에 싸울지도 모른다. 적당히 쓰고 사는게 좋다는건 알지만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모르겠다. 그 기준에 대한 타협을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테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