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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햇살 Feb 19. 2024

취미부자의 삶:클래식이 좋아서

'있어 보임'으로 시작한  클래식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꽤 큰 전축이 있었다. 두 개의 스피커와 연결된 전축은 라디오 기능과 더불어 엘피, 카세트테이프. 시디 재생이 가능했다. 없는 살림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엄마 말론 그 시절 전축은 소위 ‘있어 보이는 장식품’이라 큰 욕심을 내고 산 물건이었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생각해 보면 거실에 제네바 스피커를 두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아빠는 꽤 수입이 좋았고, 월급 이외에 추가적으로 생기는 목돈으로 엄마는 가전제품을 사들였다. 가장 먼저 샀던 건 세탁기였는데 엄마는 아직까지도 그 세탁기가 삼십팔만 원이었단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직장인 월급이 30만 원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니 꽤나 큰 소비였다. 그 이후에도 엄마는 목돈이 생길 때마다 당시 흔하지 않던 가전제품을 샀는데 그중 하나가 전축이다.   

   

 우리 집 전축 옆에는 구색을 맞추듯 클래식 명곡 시디 두 세트가 놓여 있었다. 사실 엄마와 아빠는 클래식 음반을 전혀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클래식 명곡 시디 세트도 ‘있어 보이는 장식품’에 불과했던 것 같다. 유리문이 달린 검은색 합판으로 만든 장에는 약 30장 정도의 시디가 빼곡히 들어있었고, 대부분 작곡가를 기준으로 분류되었으며 특별한 추가 구성으로 피아노 모음집이 더해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있는 시디는 클래식 세트와 아빠가 즐겨 듣던 가수 김성수의 앨범뿐이었기 때문에 심심할 때면 어쩔 수 없이 클래식을 종종 들었다.(만화 주제가 시디도 있었는데 초등학생 고학년의 자존심엔 맞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피아노 모음집을 가장 좋아했는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쇼팽의 에뛰드,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 같이 유명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클래식 세트에는 부록처럼 설명이 담긴 책자도 들어있어서 나는 음악을 들을 때면 그 책자 혹은 시디 안에 들어있는 설명집을 펴놓고 곡을 이해해보려 했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나의 추억 속에는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클래식을 듣던 장면이 녹아있다.  

        


  클래식을 좋아하던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어 아이돌에게 빠지게 되었고, 사춘기가 시작된 후 클래식을 거의 듣지 않았다. 여전히 피아노곡은 좋아했지만 정통 클래식보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들을 선호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할 때면 항상 류이치 사카모토의 ‘BTTB’와 ‘류이치 사카모토 2000’을 챙겨 듣곤 했다. 

     


 클래식을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둔 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당시 자주 가던 독립 영화관 근처에는 부산문화회관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러 가면 자연스레 길을 장식하고 있는 클래식 홍보를 접할 수 있었다. 홍보 효과가 내면에 쌓인 덕인지 어느 날 문득 클래식 공연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입사 2년 차가 되던 해였다.      


20대 시절 열심히 다녔던 공연들의 티켓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를 시작으로 피아노, 비올라, 첼로 리사이틀을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2년 가까이 매월 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가고, 사이사이 열리는 특별 공연에 가고, 더불어 뮤지컬까지 보러 다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회사와 스스로에 대한 불만의 회피 수단으로 공연을 선택했던 것 같다. 머리 아픈 현실의 문제들을 접어두고 이번 달에 볼 공연에 집중하며 음악을 듣고 영상을 찾아보는 행위는 나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 줬다. 더불어 전축으로부터 시작한 나의 클래식 연대기와 일맥을 함께하는 ‘있어 보이는’ 취미 생활은 내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교향악단의 일사불란한 연주 소리를 실제로 들으면 신기하게도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모든 공연이 그러하겠지만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어떤 매체로도 재연하기 힘들다.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5번 2악장은 들었던 곡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곡이었다. 곡의 구성상 공연에 잘 등장하지 않는 여러 악기들이 배치되어 다양한 악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클래식 입문자였던 나에게 지휘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알게 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클래식에 빠져 지내던 와중에 그 불만 많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공연을 다녔던 원동력 중 하나가 현실에 대한 회피수단이었던지라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에는 예전만큼 공연을 예매하지 않게 되었고 클래식을 듣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현실이 너무 바빠 다른 취미로 눈 돌릴 시간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를 시작하며 내가 버는 돈을 통한 자유가 사라지면서 공연은 사치스러운 취미 활동이 됐다.      


 클래식과 멀리 떨어져 지내다 요즘 다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기는 유튜브 때문이었다. 클래식을 설명해 주는 유튜브 채널들이 많이 생겼고 재미로 한 두 개씩 보다 보니 예사로 듣던 음악에 담긴 감정이나 연주자의 기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크고 내가 버는 수입이 생기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이 마음의 연장선상으로 작년 말 거의 10년 만에 공연을 예매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클래식은 심심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유흥거리였고, 20대 시절의 나에겐 현실의 불만에 대한 회피의 수단이었다. 30대 끝에 다다른 나에게 클래식은 이해의 확장이다.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어떤 해석이 필요하며, 특히 피아노의 경우 같은 악기로도 다른 소리를 내는 연주자들의 실력을 보며 감탄을 느낀다. 모든 예술 분야는 인생의 축소판과도 같다. 예술가의 성격과 환경, 이에 따른 해석과 노력이 그 세계를 얼마나 넓히고 섬세하게 조각할 수 있는지 느낄 때면 전율이 느껴진다.      


 ‘있어 보이는 장식품’으로 시작한 나의 클래식 역사는 이제 ‘단순한 유흥거리’도 아니며 ‘도피처’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있어 보이기 위함’도 아니다. 나에게 클래식이란 연주를 통해 감정의 전이를 느끼고 음악을 둘러싼 것들을 통해 또 다른 인생의 가치를 알게 하는 새로운 장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접하는 모든 예술 분야는 젊은 날에 느낀 감정과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아마 한동안 나는 계속 클래식에 다시 빠져 지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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