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을 새기는 시간
▶책을 읽게 된 계기
몇 년간 영어 원서를 읽는 독서회에 참여하고 있다. 모임에선 회원의 도서 추천과 투표를 통해 읽을 책을 정하는데 꽤 자주 후보로 언급되었지만 선정되지 않은 책이 있다. 바로 미셸 자우너 작가의 『Crying in H Mart』다. 모임에서 이미 선정하여 읽은 책 중 이민자의 삶을 녹여낸 책이 있어 내용이 겹친다는 이유로 읽을 기회가 좀처럼 닿지 않았다.
잊고 지내던 중 작년 연말 참석한 모임에서 H마트 이야기가 나왔다. 모임 참석자 중에서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잠시 한국에 들어온 대학 선배도 있었는데 미국의 음식 문화 이야기를 나누다 H마트가 화두에 올랐다. 또 다른 참석자가 뉴욕의 H마트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다며 이야기를 덧붙이며 이야기를 끌어나갔는데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꾸 들려오는 'H마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꼭 『H마트에서 울다』를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직접 고르지 않아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나를 책으로 이끈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얻고 싶었던 것
단순한 계기들의 중첩으로 'H마트'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친구가 일했던 H마트는 어떤 곳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이렇게 나와 인연이 닿는 걸까?', 'H마트가 어떤 곳인지 이 책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란 기대감으로 책장을 펼쳤다
▶나를 이끈 포인트
1. 이제야 보이는 엄마의 삶
『H마트에서 울다』는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작가 미셸 자우너는 본인이 20대 후반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 '정미'와 있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돌아보며 글을 이어간다. 아이를 낳기 전 이 책을 읽었다면 딸인 주인공의 입장에만 감정을 몰입했을 텐데 엄마가 되어 딸의 이야기를 읽으니 이야기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엄마의 감정이 크게 다가왔다.
책을 읽으며 나의 엄마가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엄마를 인정하는 대목에선 마치 내가 겪 엄마로서의 버거움이 누군가에게 이해받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콜레트 아주머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갈수록 이상해 보이고 미심쩍고 심지어 반페미니스트로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 인생의 주축이던,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엄마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 보이지 않는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열정에 헌신하지도 않고 실용적인 기술 개발도 소홀리 한 전업주부가 남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가정을 이룬다는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받은 보살핌을 그동안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서 몇 년이 지난 뒤였다. (p. 92)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87)
내가 평가절하했던 내가 걷고 있는 엄마의 삶, 그리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주부로서 내 삶의 한 면을 이 대목들을 통해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 엄마 나이에도 자기 엄마를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골이 난다. (p. 14)
책을 읽으며 내 아이를 키우느라 잊고 살았던 나를 키운 엄마의 삶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엄마의 부족했던 부분이 더 커 보여서 외면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엄마가 나를 위해 노력한 삶이 보였다. '엄마는 나를 실현 가능한 최상의 버전으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p.35)' 그간 엄마가 나에게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원망 아닌 원망이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안다. 엄마가 해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헌신하였음을. 아직 엄마를 곁에 둘 수 있음에 감사하며 관계를 좀 더 회복해야겠다고 다짐 했다.
2. 음식으로 남은 추억
주인공이 정체성은 한국 요리로 다져졌다. 엄마를 따라 '훌륭한 음식 앞에서 경건해지고, 먹는 행위에서 정서적 의미를 찾는 사람(p.10)'으로 자랐다. '찌개나 전골은 입안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 차라리 안 먹느니만 못했다' 라는 대목은 나의 기호와 닮아 더욱 공감대가 형성됐다. 『H마트에서 울다』 엄마가 사랑을 표현한 방법이었던 음식들을 통해 주인공은 엄마가 떠난 후에도 음식을 통해 치유받는다.
그러다 건조식품 코너에서 훌적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사 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p.10)
이 장면을 보며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가 서른이 되기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결혼 후 각자 사는 곳이 달라 자주 만나지 못하다 오랜만에 고향에서 만났다. 돌아오는 길 친구는 엄마를 따라 장을 보던 시장에서 사서 먹던 어묵 맛이 그립다며 함께 시장에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함께 시장을 가서 마주한 건 예상보다 많은 어묵 가게였다. 변해버린 모습과 많은 가게들 사이에서 친구는 엄마와 함께 가던 어묵 가게가 어디인지 떠올릴 수 없었고 가게 앞에 놓인 어묵 시식을 먹어가며 맛의 흔적을 뒤졌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카톡으로 가게 이름을 물은 후 택배로 주문도 가능했을 텐데 기억에 의존해 맛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식을 만드는 시간은 고스란히 사람에게 전달된다 믿는다. 배달이 일상이 됐고, 밑반찬은 사 먹는 게 경제적인 세상에서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음식은 힘을 가진다.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 또한 가치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일이 늘어날수록 다른 사람과 함께 밥 먹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시간을 나누는 것, 공통의 기억을 갖는 것은 평생 남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가치를 『H마트에서 울다』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3. '작가의 새로운 시선'으로 얻은 깨달음
『H마트에서 울다』 의 주인공의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미국인이다. 두 가지 문화를 접하며 만들어진 작가의 인식을 통해 내가 미처 생각치 못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p. 59 내가 잘 먹거나 어른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면 친척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예뻐." 예쁘다는 말이 착하다, 예의바르다는 말과 동음어로까지 사용되는 곳이다. 이렇게 도덕과 미학을 뒤섞어놓은 말은,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생각 없이 쓰던 '예쁘다'라는 단어가 가진 이질적인 면을 책을 통해 새삼스레 돌아봤다. 겉모습이 우선시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식 속에서 무심코 넘겼던 언어들을 다시 떠올렸다.
"좋아." 엄마가 말했다.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너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야" (중략)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p.248)
왜 가족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는 것일까? 실제로 나와 엄마도 매우 다른 취향을 가졌다.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식습관도 상당 부분 다르다. 엄마에게는 딸인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친구가 없고 내 친구 중에도 엄마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 서로 참 모르는 사람이구나, 정말 다른 사람인데 가족이란 이유로 다 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왔다란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내 옆의 사람을 안다고 판단하며 사는 것일까? 다 안다는 착각 속에서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것
책을 통해 나는 위로를 받았다. 어느 순간 나는 나의 자존감을 수면 위로 가라 앉혔다. 내가 지난 몇 년간 해오고 있는 엄마로서, 주부로서 하는 일을 평가 절하하고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높게 평가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일을 하는 시간보다 주부로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때면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작아져 가라 앉아 있던 자존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스로 작게 만들었던 엄마라는 위치와 삶의 모습에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자부심을 갖자는 생각을 했다. 결국 엄마가 없는 곳에서 드러나는 그 수고로움의 가치. 내가 느꼈고 또 내 아이가 느낄 엄마의 가치에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싶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p.269)
나도, 엄마도, 특별한 사람임을 다시 마음속에 새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그리고 내가 가진 엄마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또한 엄마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초보 엄마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가볍게 여기며 흘려보냈던 엄마와의 일상들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H마트에서 울다』로 느끼길 바란다.
책을 읽고난 후 생각난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엄마와 곤란
박후기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를 낳은 후의 기쁨도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내가 퇴원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울다가 웃던 엄마의 기쁨을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고통이거나 기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