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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규 Dec 21. 2022

찍는 존재

영화 <시네마 베리떼>에 인상적인 인터뷰가 나오는데. 1999년엔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 필름보다 가족적이라 느껴졌다. 이유는 당시의 상업영화는 필름으로 찍는데에 비해 가정에선 디지털 캠코더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필름이 상업적이고 디지털이 가족적이다. 지금 인식이랑은 뭔가 많이 다른게 재밌었다.


결국 손에 흔하게 잡힐수록 친숙하다는 뜻일까? 필름은 이제 손에 잡히기엔 너무 고급 취미가 되어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휴대폰으론 찍기 싫지만, 언젠가 조잡하고 조악한 휴대폰 촬영본을 볼 때면 저절로 따뜻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시대엔 다들 이렇게 찍었지 하고.


지구를 찍다보면, 무엇으로 찍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지구가 어른이 되어 돌아봐도. 아니, 우주 대스타가 되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한다 치더라도 손색이 없는 깨끗하고 높은 수준의 촬영본을 확보해야 하는가? 섣부르게 대답하자면 아니요. 그것은 삶의 기록이 아닌 삶에서 빠져나와 잠깐 짬내서 찍은 기록입니다. 촬영을 무슨 비싼 장비만 있으면 잘 찍는줄 아시나요. 조명은 어떻고 미술은 어떻고 사운드는 어떻게 할건데요? 전부 다 챙길거 아니면 아무것도 챙기지 마십쇼. 우리의 역사는 완벽하게 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기록합니까? 아직도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당장 손에 있는 휴대폰일지. FX30일지. 고프로일지. XA50일지. HF R800일지. 무엇으로 찍어도 아쉽고, 무엇으로 찍어도 뭔가 모자람을 느낍니다. 그것은 충족될 수 없는 갈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끽해야 3840x2160 사이즈에 초당 24장의 사진으로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보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삶은 어떠합니까?


이터나 촬영본에 뻑이 가 X-T3를 구매했습니다. 주밍이 매끄럽지 못해 파나소닉 S5로 교체했고, 지구를 찍기엔 오토포커스가 약해 지금은 FX30을 쓰고 있습니다. 18-105 렌즈 덕에 캠코더인 XA50의 포지션이 애매해졌지만, 반대로 캐논의 색감과 1인치 센서가 주는 투박함이 좋습니다. 프랑스 여행때 쓰고 싶어 산 고프로는, 이제 입에 물고 지구를 바라볼때 사용합니다. 그치만 가볍게 마실을 나갈 때엔 HF R800만한게 없습니다. 어느새 제 가장 오래 사용한 영상 장비가 됐네요.


찍히는 역사가 있으면 찍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걸 하나로 통일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걸로도 찍었고, 저걸로도 찍었어. 이게 정답 같아 보여도 금새 또 다른 정답이 나타났단다. 그러니 답은 없다고 생각하고, 매번 매 순간에 맞는 가장 근사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로 했어. 그렇게 놓치는 순간도 있겠지, 아쉬운 장면들도 많을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매번 너를 담아내려 애쓰던 내가 남아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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