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동규 Jan 29. 2023

추억과 품위

본가에서 군대에서 쓴 일기를 발견했다. 2년 안되는 시간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은 감정의 기록들. 한 5일치 정도 훑어보곤 바로 일반 종량제 봉투에 쳐박았다. 하다못해 한번씩 읽고 버린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릴 수 있지? 혹시나 실수로라도 세상에 남아있을까 직접 분리수거장까지 가서 최후를 확인하고 왔다. 나는 그게 왜 그리도 끔찍하게 싫었을까.


두가지 추측을 해본다. 하나는 군대에서의 기억이 끔찍했으니까. 아무리 좋은 기억도 있었다지만, 근본적으로 역겨움의 구렁텅이 속에 어쩌다 한번씩 터지는 실소 같은 기쁨이다. 그래 일단 기록은 했다지만, 어차피 신나고 즐거워서 한 기록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버티기 위한 기록이니까. 이 부분은 이해가 간다. 쳐다보기도 싫을 수 있지. 그런데 두번째 이유가 참기 힘들었다.


다름 아닌 내가 너무 상스러웠다.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사 스무살 스물 한 살이 성숙하면 얼마나 성숙하다고. 오히려 당시 또래들보단 조금 의젓하단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스러움의 불쾌함에 식은땀이 다 났다. 누가 이걸 볼까봐, 혹여나 이게 세상에 알려질까봐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추억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알게 뭐야. 나는 이 끔찍한 상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얼른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떠올린다. 품위를 잃는다는 것은 추억을 잃는 것과 같다. 언젠가의 내가 떠올리기도 싫은 하루가 되지 않도록. 그땐 그랬지, 에서 그때를 빼앗기지 않도록. 품위를 지키자. 욕을 줄이자. 상스러운 사람에서 벗어나자. 나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큐멘터리 매거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