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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 Jan 04. 2021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김성중의 『그림자』


라틴어 ‘Deus ex machina’,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신의 대리자’ 또는 ‘기계적으로 출현한 신’을 의미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많이 쓰였던 기법인데, 극중 사건 진행 과정에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뒤틀어지고 비꼬인 문제가 파국(catastrophe) 직전 무대의 꼭대기에서 기계 장치를 타고 무대 바닥에 내려온 ‘신의 대명’에 의해 해결되는 기법이다. 절대자를 대리하는 서사 속 장치(인물)는 마치 서사의 외부자인 것처럼 초자연적이고 이질적인 힘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한다.



  김성중의 <그림자>에서도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마치 기계적 신, 즉 ‘소녀’가 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기일식 후 하루아침에 그림자가 바뀐 사람들은 규율과 도덕을 거스르고 폭력적으로 식욕과 색욕에 치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자가 드러나는 낮에는 바뀐 그림자의 모습대로 행동하는데, 밤이 되어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되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림자의 모습대로 움직이던 사람들은 점점 그림자의 본능에 더욱 강하게 동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아’와 그림자를 철저히 분리한다. 그 과정에서 자아의 목소리는 묻히고 책임과 도덕,윤리와 규범도 무용해지며, 세계는 자아와 초자아(super-ego)가 생겨나기 전의 생존과 쾌락을 향한 충동만이 남은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된다.



  그림자와 함께 한 낮을 긍정하는 자도, 부정하는 자도 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남의 것이라는 생각이다.낮과 밤이 아주 극명히 차이 나는 사람들과는 달리 변화가 미미한 인물이 딱 한 명 있다. 주인공인 쌍둥이 자매 중 언니이자 동생이다. 언니였으나 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녀는 그림자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인과 난교가 만연한 낮의 도시를 떠나 서쪽 산 뒤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나 이마저도 동생이 납치되어 오래 머물 수 없게 된다. 낮의 아비규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동생을 찾던 그녀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소녀를 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그림자가 없는 그 소녀는 군말 없이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를 원래대로 돌려준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매가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림자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게 올바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되레 소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개기일식과 같은 형상으로 눈을 빛내며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2분 18초의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며 패닉에 빠진다. 나의 그림자와, 타인의 그림자와,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와, 그들의 목소리는 암전 속에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고 들린다.



  나에게 온 타인의 그림자는 정말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자크 라캉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은 구분될 수 있는가. 할머니의 꼿꼿한 허리, 삼촌의 단단한 다리, 더 나은 생존을 향한 의식적 욕망을 포함해 억압과 규범에 억눌린 충동은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자아의 통제를 받는다. 소설안의 그림자는 자아를 거세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규범과 도덕은 지워진다. 제어 없는 역동적 에너지를 가진 인간의 이드는 폭발적으로 충동을 해소하려 든다. 살해 충동, 리비도, 무한한 식욕 등 우리가 통제 받는 모든 충동, 또는 무의식적 욕망이 그림자의 속성이며 바로 이것이 그림자가 타인의 것으로 바뀌었다하여 내가 아니라 주장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소녀가 모든 상황을 해결해준다한들 작가조차 소녀를 규정하지 않았고, 그림자를 완전히 돌려놓는 건 어려움을 시사했다. 나는 소녀가 그렇게 사라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았다 하여 그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믿고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의심하며, 이것이 나의 자아인지 검열할 것이고, 결국 자신을 불신하고 타인을 헐뜯으며 똑같은 파국을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야말로 규정당하는 인물이며 그저 사람들의 욕망대로 나타나는 절대자의 기계적 현현일 뿐이다. 소녀는 구원자인가, 재앙의 근원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소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부정하고 심판하려는, 어떻게 해서든 선과 악의 프레임에 씌워보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리가 불안정하고 규정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기계적인 신은 기계적으로 사건을 ‘처리’할 뿐이다. 사회(이 소설 안에서의 ‘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 집단의 무의식은, 충동은, 욕망은, 소녀가 그림자를 바꿔놓는 행위처럼 그리 간단히 처리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집중해볼만한 이미지는 김성중 특유의 환상적이며 강렬한 색채 대비인데, 그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도 주목할 만하다. 소설은 모든 오브제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대립시킨다. 낮과 밤, 그림자와 신체, 해와 달, 그러나 사실 이것들은 간단히 두 쪽으로 나눌 수 없다. 다른 하나만 존재할 수도 없다.



  프로이트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간 심리를 구성한다고 했다. 이드만이 남는다면 세계는 자멸할테고 우리는 자아의 통제와 초자아의 양심으로 그것을 회유하고 절제하며 살아간다. 무의식적 욕망만이 나라고 할 수도 없고 자아의 부름만이 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구분 짓는 이미지를 통해 오히려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걸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이 메시지는 쌍둥이 자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쌍둥이는 유일하게 그림자에 이끌리지도,육신을 배격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탐구한다. 서로의 욕망과 존재 경계가 희미하여 ‘본질’의 나를 헷갈려하고 의심하는 쌍둥이가 바로 현실의 대변자이다.



  달이 해를 가린다, 세상이 그림자가 될 때 우리는 그 곳에서 내 그림자를 잃는다. 남을 인식할 수 있을 때 나를 구분할 수 없고 남을 인식할 수 없을 때 나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순적이다. 무의식은 모방을 수용하며 타인과의 경계를 허문다.기준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혼재하며 교환된다. 본질의 나는 누구인가? 이 소설에서 본질은 진리로 통용되어 사람들은 맹인교의 교주가 본질인 양 따랐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소녀’의 등장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그러니 감각으로 인지하는 나도 진정한 내가 아니고, 법규를 지키며 사는 사회적인 나도 내가 아니고, 소셜 미디어에서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나도 내가 아니고, 밤에 자기 전 천장에 비친 그림자마저 내가 아닌데, 과연 누굴 본질의 나로 단정할 수 있을까. 만일 현실에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소녀’가 등장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그림자를 내어주어야 할까. 이 소설은 ‘나’라는 존재론에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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