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넘기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지난해 4/4분기 석 달 중 두 달은 여성 연예인 두 명이 세상을 등졌다. 둘은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들어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던 자들이었다. 펜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이 든다.
지난달에는 미성년자 여성 연예인이 중년 남성 개그맨에게 성희롱과 폭력을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교육방송 EBS에서 생방송 중 벌어진 일이었다. 38살 남성이 15살 여성에게 ‘독한년’이라고 말했고, 그 날 포털 검색어 순위에는 하루종일 ‘리스테린 소독’에 관련된 키워드가 상위권에 올랐다. 일부 남성들은 여초 커뮤니티가 어떻게 성매매 관련 은어를 알고 있냐며 비아냥댔다.
이와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두 개그맨의 처벌을 요청하는 취지의 청원이 올라왔으나, 송출 플랫폼이 유튜브 채널이라는 이유로 처벌은 불가능했다.
중소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는 아이돌을 소위 ‘망돌’이라는 실패로 낙인찍던 CJ ENM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시리즈는 4년간의 전 시즌이 거대 작당모의로 드러났다. 안준영 메인 PD는 석 달 간 4천만 원이 넘는 접대를 받아왔다. 남성을 전시해 (주로) 여성의 주머니를 털고자 사용한 회심의 도구마저 (죄다) 여성이었다.
그 사이 여성을 사지로 내몬 승리와 정준영 일당은 ‘도덕적으로 미안하다’라며 처벌의 영역으로 들어가길 거부했다. 여성 스태프를 성폭행한 강지환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며 선처를 호소했다.
환멸난다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는다마는 케이팝 산업에서의 미성년과 여성을 쥐어짜는 구조는 실로 넌더리가 난다. 어린 사람과 예쁜 사람이라고 하기엔 방점이 모호하다. 확실히 어린 ‘것’과 예쁜 ‘것’으로 환원된 그들의 정체성이 스스로를 사지로 내몰거나 또는 책망하게 만들었다.
일관되게 강요당하는 그 기준 덕에 어떤 아이돌은 ATM기도 사용할 줄 모르며 어떤 아이돌은 ‘독한년’ 폭언을 듣고도 자신의 탓이라 눈물을 흘렸고 어떤 아이돌은 자살했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그놈의 악성 댓글이 죽였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 역시 ‘악플러’라는 기표에 책임을 전가하는 기만일 뿐이다. 댓글 수위는 법적으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도덕을 쉽게 저버린다.
과장 조금 보태 이틀에 한 번 꼴로 공황장애, 불안장애 기사를 쓴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지만 우울은 전염된다. 혹여 어린 아이들이 곁의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넘어질까 걱정된다.
케이팝 산업에서 미성년 연습생에게 충분한 사회화 과정은 필수적이다. 학업도 병행돼야 한다. 꿈을 위해 학업도 접은, 따위로 경쟁력을 얻으려는 전략은 성인이 미성년에게 배울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심보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지켜본 결과 방송가엔 유감스럽게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성인이 없는 듯 하다. 영화 ‘우리집’의 아동 배우 동반 촬영 수칙처럼 타자에 대한 기본적 존중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 구성원 모두가 의무적으로,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단은 오해를 낳지만, 무심은 상처를 낳는다.
이처럼 ’추락’, ‘얼룩’, ‘오명’이 난무하는 가요・방송가와는 달리 영화계에선 여성 감독들이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벌새’, ‘메기’, ‘아워바디’ 등 독립 영화부터 ‘82년생 김지영’, ‘나를 찾아줘’, ‘윤희에게’ 등…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녀로만 취급하던 서사로부터 탈피한,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다가갔다. 제작자들은 입을 모아 ‘이런 자리가 더욱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라고 결의 넘치게 말했다.
여러 영상 콘텐츠가 있겠지마는 특히 화두가 된 펭수나 유산슬을 생각하면, 콘텐츠 제작의 시작은 탄탄한 캐릭터 구축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탈 쓴 인형이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남극에서 헤엄쳐 온 연습생이라고 소개하는 허무맹랑한 콘셉트지만 대중들에게는 인형 탈을 쓴 허구의 캐릭터 이상으로 다가간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모두가 최면 걸린 듯 믿게 하는 (믿고 싶게 하는) 그 능력에 감탄했다.
유산슬은 유재석의 인기에 기댄 캐릭터임을 감안해도 이례적이다. 여태까지 유재석은 '유재석'이라는 인간을 활용해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유산슬은 다른 차원의 세계관을 형성해 '유산슬 유니버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기를 끌려면 우주를 창조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해는 준비된 많은 사람에게 유의미한 관심이 더 많아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나 역시 유의미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