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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Mar 03. 2024

아카시아 껌종이와 함께 사라진 88년 오월의 추억

  하숙집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가방을 던지다시피 하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서클 친구 '신'이었다. 깔끔하고 재기 발랄한 그녀 이름이 파란 잉크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봉투 한쪽 모서리에는 세련된 아카시아 껌 종이가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서클에서 '신'은 스타였다. 행사 때마다 앞에 나와 사회를 봤고 싱어롱에 맞춰 율동도 곧잘 했다. 그녀 혼자일 때도 있었고 기타를 둘러맨 선배와 듀엣일 때도 있었다. 그걸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던 나에게 그들은 별세계 사람들이었다. 세상 고상한 척 진지한 척 혼자 다했던 나는 은근히 그들을 낮춰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편지가 온 것이다.


  내가 영원히 알아채지 못했을 고민이 담겨 있었다. 외롭다고 했다. 주목받을수록 더 외롭다고 했다. 뜻밖의 생각이 담긴 그녀 편지를 외계에서 날아온 메시지라도 되듯 해석하고 또 해석했다. 군데군데 잘못 쓴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칼로 깔끔하게 오려져 있었다.


  그녀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얼른 ‘나’라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점점 커져 사명감이 되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처럼 초조했다.

 

  침침한 형광등 아래 엎드렸다. 그리고는 생각을 쏟아냈다. 생각을 풀어놓다 보니 알아채지 못한 마음도 드러났다. 그런 척했을 뿐 그녀에게 관심이 없던 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말로 채 부화하지 못한 감정들이 그토록 부풀어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손에서는 쥐가 났다. 혹여 조바심까지 담길까 조심스레 봉투를 봉했다. 몇 번을 떼었다 붙여도 우표는 바로 붙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강의실에서 과 친구 하나가 나를 보았다고 했다. 고추 튀김이 유명한 리어카 앞을 그녀와 내가 지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껏 그보다 심각한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순간 모든 걸 부정하고픈 유혹이 엄습했다. 동시에 그게 헛일이라는 것도 직감했다. 갓 피어난 젊음의 열기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나던 88년 오월은 그렇게 편지 한 통에 흔들렸다.


  '나'라는 정원에 그녀를 이끄는 데 나는 서툴렀을 거다. 보폭이 좁아지고 발길이 잦아들며 나는 초조해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녀 손이 아닌 팔목을 잡았을 것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으론 부족해 어느 순간 설명하고 주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편안한 소파가 필요했을 그녀에게 딱딱한 데다 한쪽 다리 짧은 스툴을 내밀었을 것이다.


  늦은 밤 기숙사 앞에서 내가 그녀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고 한다. 순간 창이 하나 둘 밝아졌다고 한다. 허둥대며 쫓아온 경비아저씨와 실랑이가 붙은 나를 친구가 겨우 뜯어말려 돌아왔다고도 했다.


  다음날 아침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하숙방에서 나만이 지난밤 언저리를 황망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어르고 달래던 그녀 얼굴은 떠올랐지만 내가 쏟아냈던 말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운 공기에 스민 외로움이 살갗에 쩍쩍 들러붙던 팔월의 어느 날 나는 빳빳한 아카시아 껌 종이를 촛불 위에 가만히 올렸다. 잠시 머물다 온 그녀란 세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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