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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Mar 06. 2023

스무디와 한의원

내향인의 응석 공간

“산모님 소리 지르세요. 참지 말고 지르세요.”

 산부인과에서 혼났던 나다. 참느라 이를 악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소리를 지르라 하셨다.

 어지간하면 참는다. 피가 보여도 곁에 있는 사람 놀라는 것이 더 싫어 일단 감싸고 본다. 내색하지 않는 편인데, 도무지 참기 힘든 것이 있다. 약침, 전기침, 전기치료 이런 찌릿함은 이기기 힘들다. 큰 통증이 아님에도 무섭다. 내 몸이 하나의 고무줄이 되는 느낌이다. 한껏 늘여 튕겨나가기 직전의 고무줄. 아슬아슬. 참기 버거운 초조함.

스무디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행주를 빨다 멈춘다. 엇. 손목이? 손목과 고개를 동시에 갸우뚱. 온종일 블렌더 볼을 들었다 내렸다 하다 보니 수상하다. 아파질 낌새가 보이면 미리 한의원에 가야 한다.


 스무디 먹겠다고 달리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겉옷 없이 달리던 친구. 쉬는 시간 30분 전부터 미리 점퍼 입고 있었다는 친구. 헉헉거리며 키오스크로 돌진하는 아가들. 그 감사한 전력질주에 보답하기 위해 한의원에 간다.

 <준비된 손목력이 소진되어 스무디는 어렵습니다> 할 수는 없으니 나도 달린다. 가게 뒤 한의원으로.


  "아......"

  다 좋은데 약침이 문제다. 근육이 다치지 않도록 버티는 힘을 보강한다는 약침. 원장님 말씀처럼 효과는 좋지만, 맞을 때 찌릿을 준비하는 순간이 두렵다. 아프다 말하기에는 애매한 아픔. 움찔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내향인인 나는, 뭐든 투정 없이 참겠는데 약침만큼은 묵묵히 버티기 어렵다.


 더군다나 원장님 음성은 너무나 온화하다. 어리광을 부르는 음성.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나긋나긋 말씀하실 때면 출산 때에도 참던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나답지 않게 '약침은 아파서요' 소리를 해내게 만드시는 원장님.


  원장님의 ‘응석 유발 온화함’에 대해 설명하자면, 방문 때마다 옆침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청취하다 아픈 곳을 잊게 되는 정도의 따뜻함이라 하겠다.

 오늘 커튼 너머의 어르신께서는 '원장님 식탁 의자가 부서졌는데요'로 시작하신 뒤, 허리 통증에 대해 오래 하소연 중이시다. "예~ 예", "아이고 힘드시지요" 원장님의 힘 있고 다정한 추임새는 흐늘거리는 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넣어주는 공기주입기 같다. 팽팽하게 차오른 바퀴의 공기처럼 어르신의 음성에 응석이 듬뿍 담긴다. 부럽다. 나도 어서 더 나이 들고 싶다. 그때에도 꼭 이 원장님께서 계셨으면 좋겠다. 그땐 나도 가구를 원장님 조언 없이 사지 않을 것이다.

 식탁의자 높이와 허리 통증의 연관성을 안내하시는 인자한 원장님 말씀을 듣느라 손목의 통증이 잊힌다.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 우리 집 식탁의자도 바꾸고 싶다. 식탁의 높이와 30cm 차이나는 적절한 높이가 맞는지, 앉았을 때 척추가 곧게 펴지는지, 퇴근하면 식탁의자의 높이를 확인할 것이다. 손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식탁의자이다.


  두근두근. 차례를 기다리며 누워 약침 거절 계획을 세운다. 오늘은 단호하게 “선생님 전 약침은 안 맞겠습니다.” 해볼까. 아니면 평소처럼 작은 목소리로 “약침은 빼고 해 주세요.” 할까. 아니야. 더 아파지기 전에 참고 맞아야 할까.

 혼자 갖은 상황극을 펼치는데 드디어 커튼이 걷힌다. "오늘도 손목 때문에 오셨나요?" 원장님 음성. '손목 때문에 왔지만 식탁 의자가 더 중요해졌어요.' 더 어른이 되면 이런 농담을 해야지.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지금은.


  미리 써두었던 대본이 무색하게 원장님께서 먼저 말씀하신다. 아직 부리지도 못한 약침 어리광을 알아채셨다. "오늘도 약침은 어려우실까요. 아무래도 반복해서 아프면 약침이 효과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게 놓아 볼게요. 어떠세요?" 아 피할 수 없다. "네 그럼 하나만 맞을게요." 어리광과 용기를 함께 담아 답한다.


 "잠시 따끔합니다." 찌릿. "아이고 잘 참으셨어요. 잘 하시는데요." 티 내기 힘들어하는 마흔셋 내향인을, 칭찬받아 우쭐한 응석받이로 만들어 버리시는 원장님. 침을 맞고 누워있자니 웃음이 난다. 이게 뭐라고 떨었는지. 손목 통증도 찌릿 공포증도 좀 가벼워진다.

 힘찬 한의원은 내향인인 내가 앓는 소리 내고 일상을 더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감사한 공간이다.


 손목이 가뿐해졌으니 나도 오늘의 응석 아가들에게 돌아가야지. 풀리지 않는 피로 ‘찌릿’ 풀어주는 약침 같은 스무디 만들러 가야지.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 ‘찌릿‘ 들어주는 원장님 따라 힘찬 사장 자리로 달려가야지.


( 픈 곳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치료가 필요한 것만은 확실한 내향인 친구여, 우리 동네 힘찬 한의원으로 오라! )


대학 합격 소식을 들려주러 온, 뷔 닮은 학생의 선물. 이 친구들의 스무디를 위해 나는 오늘도 한의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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