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삶
듣자마자 기분이 팍 상했다. 우리가 무슨 고성방가를 지르며 시끄럽게 했나? 다 같이 힘들고 지치지만 힘내자는 의도로 밝게 인사를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밝게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이 백인 아주머니는 뭐지?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셔서 예민하신 건가? 동양인이라고 괜히 인종 차별하며 시비를 거시는 건가? 함께 인사를 주고받았던 현지인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당황스러웠다. 또한 짧은 영어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예 무시하며 못 알아듣는 척하려다가 잘 참고 우선은 '알았어요, 미안합니다'는 말과 함께 그곳을 지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당황스러웠다. 트레킹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면서 느낀 대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불필요하게 내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지만 과하게 남을 의식하거나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아니었기를 바라지만 여러 국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었는데 알고 보니 백인우월주의로부터 나오는 인종차별인 경우가 많았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그 앞에 라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즈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방을 예약해둔 상태였다. 나 혼자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그것도 해가 잘 드는 따뜻한 방이었다. 이 녀석 어리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며칠 동안 물로 씻기는커녕 속옷과 양말을 자주 갈아 신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뭔가 행복하고 좋았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앉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해를 쬐고 있으니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금 자면 밤에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아 선크림을 덧바르고 밖으로 나갔다.
'와! 최고다 여기'
로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세계 최고의 만년설산들이 뿜어내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쿰부 히말라야 대자연에 압도당하며 서서히 주변 산책 후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여전히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감사하게 식욕은 있는지 3,500 원 하는 공깃밥을 시켜 미리 준비해온 고추장과 캔 참치를 비벼 마늘 수프와 함께 조금 이른 저녁을 먹었다. 속이 더 불편해지기 전에 미리 소화제도 한 알 먹었다.
저녁을 먹으며 혼자 트레킹 중인 사람들을 만났다. 작년까지 중학교에서 과학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다 올해 퇴직하신 60세 일본인 아저씨. 산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셨다. 우리나라도 7번 넘게 방문하셨고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한국의 명산들을 모두 등반해본 경험이 있으셨다. 내 나이 때의 아들, 딸들이 있으신 아저씨와 나는 서툰 영어지만 3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아저씨는 중간중간 일본어와 특유의 일본인 스타일의 추임새를 섞어가며 말씀하셨다. 그분의 포터 또한 친근했고 착해 보였다. 결혼 3년 차 24살의 포터. 1살 된 딸이 있고 여기서 포터로 일하며 생계유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24살에 아빠이며 남편이라니 대단했다. 부럽기도 했지만 24살에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간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잠시 후 40대 전후로 보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남자를 만났다. 한 달 휴가 중 3주를 네팔에서 보내는 그가 부러웠다. 서양인들을 만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나라도 이런 휴가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경우 연평균 5~6일 정도 휴가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2주 이상의 코스인 히말라야 트레킹에 도전하는 것은 어려운 편이다. 또한 이들처럼 충분한 여유를 누리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경험하는 것도 어려운 것 같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지만 하산 중인 스페인 남자로부터 들은 따끈따끈한 EBC와 칼라파타르 등반 후기는 나를 더 설레고 기대하게 했다. 아쉬웠지만 트레커들과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돌아보니 정말 쉽지 않은 하루였지만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 여기서 잠깐!
1. EBC
Everest Base Camp의 약자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기 위한 기지가 될 캠프. 일반인들이 쿰부 히말라야 지역을 트레킹할 때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며,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2. 칼라파타르
해발고도 약 5,550m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 EBC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을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며 에베레스트 산을 감성하기 위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봉우리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지 일반인들에게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산악 장비 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지역이다. 칼라파타르 봉우리에 오를 경우 에베레스트 산은 물론 로체 산과 눕체 산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로 눈 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