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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타임즈W Sep 22. 2020

우주에서 만난 나

내 일상의 행간엔 늘 ‘책’이 있었다. 바쁜 일상 속 틈틈이 읽는 책 한 권만큼 나의 워라밸 라이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도 없다. 어떤 책이든 저마다의 교훈을 담고 있고,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같은 책이라도 다른 해답을 보여준다. 미술책에서 사랑을 배우기도 하고, 에세이에서 청소법을 익히기도 한다. 오늘 내가 읽고 추천한 책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발견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작년부터 인기를 끈 국내 SF소설을 읽고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곤, ‘현실을 피해 우주로 휴양을 떠난다’ 따위의 주제를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SF소설을 <해리포터>나 마블 시리즈 같은 판타지로 착각한 것이다. 사이언스 픽션, 한글로 공상 과학. SF소설의 근간에는 ‘과학’이 있고, 그 과학은 우리의 현실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었다. 


비말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비대면으로 소통한다. 지구 온난화로 생긴 기후 변화로 호우가 지속된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공상과학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천선란은 <어떤 물질의 사랑> 작가의 말에서 "세상을 알아갈수록, 지구는 엉망진창이다. (···) 나 하나가 방향을 잡고 노를 젓는다고 해서 바뀔까? (···) 저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라고 썼다. 


너무 힘들고 답답할 때 하늘을 본 경험이 있는가? 드넓은 이 지구와 우주에서 내가 티끌만큼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인간끼리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 현실이 우스워진다. 방금까지 죽을 것 같던 고민들이 전 우주적, 전 지구적으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정말 중요한 고민은 그게 아니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라며 외면하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두 명의 한국 여성 작가가 쓴 SF소설에는 여성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의 편견에 대한 반격도 담겨있다.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계인과 소통하는 이야기, 인간에게 결점이 없도록 완벽하게 개조하는 능력이 개발되자 오히려 비개조인이 차별받는 이야기,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나이 많은 동양인 비혼모라는 이유로 비판받는 이야기 등을 읽으면서 우주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 종족일 뿐인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한 김초엽의 소설집. / 사진=허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장르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15만 부 이상 팔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하 우빛속)>은 한국 SF소설의 부흥기를 이끈 장본인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선배들과 그 뒤를 따른 괴물 같은 신인들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김초엽의 소설에는 ‘한국 SF의 우아한 계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직접 읽어본 후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단어는 ‘반칙’이었다. 그녀가 1993년생이라는 것과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문과인 나를 ‘열폭(열등감 폭발)’하게 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굳이 강요하지 않고 덤덤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다. 기발한 상상력과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따스함이 기다리고 있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는 마음(<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세상이 정해놓은 승패를 떠나 나의 가치를 찾는 일(<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보려는 마음(<스펙트럼>). 그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기대 없이는 불가능한 시도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인간의 감정을 만질 수 있다면(<감정의 물성>), 죽은 이를 재현한 데이터가 사라진다면(<관내분실>), 외계인이 인간에 개입한다면(<공생 가설>)···. 김초엽이 제안하는 ‘가설’들을 따라 미래로 미래로 나아가다 보면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현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천 개의 파랑>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천선란 작가의 첫 소설집. / 사진=아작

<어떤 물질의 사랑>

SF소설 역시 여타의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큰 장르로 묶였을 뿐, 작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김초엽의 SF가 우아하다면, 천선란의 SF는 처연하다. 첫인상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어떤 물질의 사랑>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인 「사막으로」의 먹먹함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이것이 제발 작가의 실화가 아니기만을 바랐으나 치매 어머니가 기억하는 유일한 단어가 딸의 꿈인 ‘작가’였고, 그 기억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머니의 병실을 지키며 쓴 글들이 모여 이토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설집이 탄생했다. 비극의 끄트머리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소설 속 아버지는 자신이 꿋꿋이 걸어온 사막의 길을 딸에게도 안내한다. 거친 사막의 끝에서 소설 속 주인공은 오아시스를 만났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적당히 외로움을 길 밖으로 내던지며 나아가야 한다. 외로움이 적재되면 도로도 쉽게 무너지니까.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든 단편은 표제작인 <어떤 물질의 사랑>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어머니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주인공은 ‘엄마표 우기기 비법’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문장의 마법을 알고 있다. 이전에 만났던 친구의 좌우명이 “그럴 수 있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고 짜증 나고 열받는 일이 생겨도 “그럴 수 있지”라고 이야기하면 신기하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잊고 있던 그 문장을 SF소설 속에서 만날 줄이야.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주인공을 비극이라며 슬퍼하기는커녕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자신의 기준에 세상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인다. 사실 우리는 모두 정상인 척하는 비정상의 존재이지 않은가? 


차량 추돌 시험에 사용된 후 버려지는 인간 마네킹 ‘더미’에까지 연민을 느끼는 작가의 섬세함은 작중 인물들의 감정을 바다 저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이 있다. 그 감정들이 못 견디게 힘들다가도 후련하고, 쓸쓸하다가도 희망이 반짝여서 결국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뒤집어보고, 거울에 비춰보고, 멀리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우리가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자칫 허무맹랑해 보이는 SF소설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점검해볼 일이다.



데일리타임즈W 김수영 기자 dtnew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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