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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Feb 15. 2022

어느 철학자의 삶의 마지막 1년 : ⌜아침의 피아노⌟

나에게 삶의 마지막 1년이 주어진다면?

#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 한겨레 출판사

# 2018년 10월


# 한 줄 추천평 : ★★★☆☆ 

작가의 말로 갈음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와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다면 (후략)" 


# 읽기 쉬는 정도 : ★★★★☆ 

완독을 목표로 한다면 1시간 컷 가능할 정도로 짧은 글로 되어있다. 하지만 빠르게 읽어버리고 싶어지지 않는 책. 






우리 함께 모여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자


합정에서 한남으로 이사한 서사 당신의 서재(https://seosa.co.kr/)에서 ⌜아침의 피아노⌟ 책을 두고 죽음을 주제로 하여 독서모임을 가졌다. 독서모임이지만, 누구도 페이지를 언급하거나 책을 뒤적이며 대화하지 않는다.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은 단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꺼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줬을 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쉽게 꺼내 들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 게걸스럽게 토해낸다. 배경도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른 이들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는 비슷하게 공감하는 지점이 많아서 신기하다. 그중에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얘기해보자고 쉽게 꺼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서 아쉽다'라는 점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에 더욱 나눌 수 있던 죽음의 이야기이다. 


총 3번의 모임을 가지는 동안 농도 짙게 죽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죽음을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다. '죽음'에 대해 정의 내리고 싶었고, 소위 개죽음과 좋은 죽음은 무엇일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어떤 곳이 좋은 죽음의 공간일까? 등등 죽음에 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거리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넘어갔을 사소한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한 대화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모임이었다.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어느 철학자의 마지막 13개월의 일기 : ⌜아침의 피아노⌟ 


저자가 암을 진단받은 2017년 7월부터 돌아가시기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썼던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출간하였다. 한 줄짜리, 두 줄짜리, 길어봤자 에이포 반 장도 안 되는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 완독을 목표로 한다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3시간 컷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버리고 싶지 않은 책이다. 


너무 정갈하고 단아한 문체가 저자의 높은 정신세계를 느끼게 한다. 문장이나 글 하나하나가 스님의 목탁 소리, 깊은 산속 절의 풍경 소리 같은 느낌이 난다. 나는 정신세계가 미숙해서 글도 개발새발 거칠다. 나에게선 이런 문체가 나오지 않음을 자성하며 학자의 한 글자 한 글자에 탄복한다. 


내가 잘 살았는가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면서 남아있을 때 충분히 사랑하자라고 다짐한다. 다른 어떤 번민 없이 오로지 시간만 남아 있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 속에 부정적인 것들을 채워 넣을 이유가 없다. 세상에 대해 고민하던 철학자의 생각이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깊숙하게 들어간다.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 그리고 가끔씩 병을 앓고 있으며 아픔 때문에,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몸 때문에 약해지고 짜증 내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다. 


이 책에는 대답보단 질문이 더 많다. 나는 내가 가지는 질문들에 대해 많아도 다섯 문장으로 답을 내리고 싶다.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간결하지만 나만의 개똥철학이 집약된 답을 찾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나만의 답을 꺼내서 명확하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아마도 평생 동안 질문과 답을 찾았을 철학자께서 죽기 직전까지 질문을 하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 죽을 때까지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구나. 죽을 때까지 질문은 끊이지 않겠구나 하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지금도 목전에 닥친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거기서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등등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죽음을 바라보고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저자의 상황이 부러웠다.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짜증과 우울이 치밀어 오르고, 때론 통증과 약 기운에 제정신이 아니겠지만, 응급실에서 보았던 수많은 '갑작스러운'죽음에 빗대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있는 저자가 행운일 수 있다. -라고 얘기했을 때 독서모임 멤버들이 놀라움을 표현해서 내가 더 놀랐다. 죽음에 좋음과 나쁨으로 그라데이션을 입혀 본다면, 전혀 준비되지 않고, 대비되지 않은 죽음은 나쁜 죽음에 가까울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책은 차근히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두려움과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저자의 글이 비록 한 문장일지라도 굉장히 묵직하게 다가온다. 저자와 같이 우리도 하루하루 매 순간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죽어간다'는 느낌보다 오늘 하루도 '살아간다', '살아낸다', '생존한다', '버틴다' 등의 서술어가 오늘을 표현하는데 더 가깝거나 익숙하다.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인식이 죽음보다는 생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뇌가 왜 이렇게 프로그래밍 됐는 지는 모르겠지만, 진화할 때부터 모든 생물은 자신의 생명의 끝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죽음이 손에 잡힐 듯하다. 작가의 글에서 죽음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하다. 저승사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하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 수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오늘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긴 쉽지 않다. 또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대출을 왕창 땡겨서 오늘만 살 것처럼 호화로운 쾌락을 즐길 수도 없다. 우리에겐 아마도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고, 또 1년 후, 10년 후가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죽음을 마냥 먼 것만으로, 마냥 가까운 것만으로 여기기 쉽지 않다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우리는 분명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화의 시작은 죽음으로 시작했지만 반복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닿는 질문은 잘 사는 법이었다. 죽음을 어떻게 보든 간에 결국 '좋은 죽음'을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원하는 죽음을 그려본다. 그걸 마지막 지점으로 삼고, 그러한 죽음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죽음을 출발 지점으로 삼고 거꾸로 현재를 바라본다. Retrospective 하게.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 대한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죽음에 관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 책들은 죽음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모든 죽음에 관한 책들은 최종적으론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N과 S극의 자석과 같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거나 생각해보는 게 좋은 점은 바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마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내가 '좋은 죽음'을 잘 준비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나에게 생애 마지막 1년이 남았다면?  메인 질문으로 가져갔던 주제였다. 나는 사실 이건 두 개의 작은 질문으로 세분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생애 마지막 1년과 골골대며 병원을 가까이에 끼고 있어야 하는 생애 마지막 1년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당장 세계 여행이라도 떠날 것 같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불가능하다. 후자의 경우라면 해외에 갔을 때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가게 된다면 거기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1년 뒤에 죽는다고 해도 평생을 미뤄뒀던 버킷리스트는 실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이렇게 죽음을 논함에 있어 병원 이야기가 빠질 수 없고, 결국 ‘죽음’ 은 질병, 아픔, 돌봄에 대한 담론이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죽음의 경험과 함께 병원에서의 경험도 나눈다.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우리 가족은, 그래도 나는 병원에서 죽기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죽음은 '죽음'이라는 한 순간이라기 보단 '죽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간략화해보면 오른쪽 그래프와 같을 것이다(물론 개인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다양한 그래프가 나오겠지만 가장 단순화시켜보면). 


우리는 지금은 기울기가 완만하게 죽어가고 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책을 읽으며 가끔씩 죽음을 떠올리며 현재의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그런데 기울기가 갑자기 확 가파러지는 그 시점이 된다면? 빠른 속도로 죽어갈 때, 죽음의 과정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는 앞에 말한 삶에 대한 고민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웰다잉'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시점이 바로 이 구간이며 좋은 죽음을 위해서 좋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거론된다. 이 구간에서 '잘 죽어가기'위해서는 개인과 가족의 노력은 물론 사회가, 국가가 필요하다는 포인트는 좋은 죽음에 대한 고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대화는 죽음의 공간으로서의 병원을 넘어서 좋은 죽음을 위해서 필요한 돌봄, 제도 등에 대한 토론까지 이어진다. (언젠가 브런치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를)


그리고 마지막까지 일치했던 우리의 결론. 

"잘 죽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네요."




서사 당신의 서재 : https://seo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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