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겨울을 뚫고 올라온 탐라의 매화
매화를 보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2014년인가, 큰맘 먹고 광양 매화축제에 갔다.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해서 이미 어둑해진 때 도착한 광양이었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한 매화 축제 현장엔 매화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야속한 봄비에 텅 빈 매화 가지만 보고 돌아서는 관광객들에게 '구례 산수유 축제를 가보세요!'라는 축제 자원봉사자의 공허한 문장만 떠돌았다.
"산수유? 산수유는 어떻게 생긴 꽃이야? 몰라ㅠ 매화 없어ㅠ"
라며 산수유 축제에 가서 노랗고 귀여운 아기자기한 산수유 꽃을 봤던 기억이 있다. 매화와 바이오리듬이 맞지 않았던 순간은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향긋한 매화는 상상으로만 봤어야 했다.
대실패를 겪은 후 매화 축제에 다시금 발걸음 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날짜 맞추기도 어렵고, 그때의 트라우마도 작용했기에 '매화 축제를 가자!'라고 당당하게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서기엔 불안감과 두려움이 여행길을 막아섰다.
그러다 2월 말. 예정이 없던 제주 여행길이 열렸다. 지난 1월 중순에 제주 겨우살이를 끝내고 한 달 반 만에 맞이한 짧은 제주 여행. 유채가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함께 매화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걸매생태공원 매화원을 찾는다. 걸매생태공원을 처음 본 건 2021년 5월 중순. ‘5월이면 지금이 봄 아니야?’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제주의 봄은 떠나갔고, 여름이 성큼 다가와 비와 안개를 흩뿌리던 날이었다. 매화는 당연히 없었고, '매실나무' 그리고 '매화원'이라는 푯말만 이 나무가 매화를 피어내는 나무임을 알려주었다. 이곳에 매화가 가득 피어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역시나 상상만 하며.
하지만 2월 마지막 주말. 그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걸매생태공원을 빗겨 내려다보던 호텔에서도 새하얀 매화가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달밤에 빛나는 매화를 보러 왜 나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서울의 번잡함에 치여 풍류를 즐기며 노니는 걸 그새 까먹어버렸나 보다.
일요일 오전 10시 걸매생태공원 매화원을 찾았다. 출사지로 유명한 모양인지 대포 카메라를 든 두 명의 사진사 외에는 우리뿐이다. 꽃잎과 수술이 봄의 생기를 받아 반짝이며 조화를 이룬 매화는 성능 좋은 카메라에 담고 싶어지는 대상이다.
"마스크 내려봐. 꽃 향기 장난 아냐!"
남편은 마스크를 내리자마자 모든 후각을 잠식해간 매화향을 맡았던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그 공간은 매화향이 지배하고 있었다. 매화향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맡아봤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은 아니지만, 이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강인한 향이다. 이 향을 담을 수 있다면, 향수로 흉내 낼 수 있다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싶다.
만개한 매화나무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고 아직도 꽃봉오리인 상태로 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다른 종류라서 그런 걸까? 궁금해진다. 한 나무에선 개화 시기가 동일했다. 즉, 한 송이도 안 피었으면 다 안 피었고, 한 송이라도 피어있으면 그 나무 전부가 피어 있었다. 또, 꽃의 중심부가 노란 매화도 있었고, 분홍 매화도 있었다. 꽃봉오리는 분홍빛을 띄고 있다.
매화를 실물로 이렇게 영접한 적이 처음이라 매화를 구경하고 향을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매화나무 아래 돗자리를 까는 젊은이들, 어린 딸에게 하얀 원피스를 차려 입히고 사진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가족들, 삼각대를 들고 역시나 하얀 옷을 차려입은 커플들이 등장했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매화에 취하고 있다.
사군자 매난국죽의 하나로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른 꽃을 피우는 매화는 고고한 절개로 문인화의 주요 모티브이다. 직접 본 매화나무에서 눈이 쌓여 있지 않고 봄기운을 물씬 풍김에도 고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가지의 자라남 때문이다. 가지가 대체로 수직에 가까운 각도를 가지고 하늘로 치솟고 있다. 사선보단 수직으로 솟구치는 매화 가지의 모습에 눈 쌓인 가지에 핀 꽃도 꽃이겠지만 자라나는 가지의 모양도 고아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혹시 공원에서 관리받은 매화나무만의 특징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달밤, 매화향이 가득한 매화원에 드러누워 매화수를 들이켜면 그야말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될 듯하다. 그날을 기약하며 다시금 내가 좋아하는 걸매생태공원의 용천수가 퐁퐁 솟아나는 솜반천의 주상절리를 구경하고 봄기운을 온몸에 묻힌 채 뒤로했다. 달 밝은 밤에도, 달 없는 밤에도 풍류를 즐길 곳이 넘치는 탐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