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모여 역사가 된다
2022년 호림박물관이 개관한 지 4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2022년 봄 전시의 제목은 바로 <기억>이다. 전시는 각층의 전시실마다 세 주제로 구성되었다. <마음이 우러나다>, <삶이 이어지다>, <참이 드러나다>이다.
옛사람들의 기억의 행위에 대해 유물로 보여준다. 묘지합들이 많이 전시되어있다. 커다란 무덤들이 다 도굴당한 걸까. 묘지합들에게서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감도는 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아서 일까, 원래 떠난 이를 기리기 위한 장치일까. 백자 묘지합들이 이곳에 있는 게 어울리지 않고, 안타까움이 든다.
제기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보고 싶지 않았다. 저 형태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답답한 제사의 순간과 명절 풍경이 떠올라 짜증이 난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제기를 깨끗한 하얀 수건으로 닦는 할머니의 모습은 '할머니'라는 단어를 연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부모를 위해 몇십 년을 닦은 제기이다. 허리가 휘도록, 손가락이 굽도록 제사를 손에서 못 놓는 할머니이다.
첫 전시가 조선시대 유물이었지만 두 번째 주제에선 도리어 역사의 시간이 확 깊어진다. 그와 함께 조명은 더욱 어두워진다. 3층 전시실에 들어가면 어두운 조명 아래 철갑옷 하나가 카리스마 있게 관람객을 맞이한다. 와인과 친구와 더불어 오래될수록 좋은 건 바로 유물이 아닐까. 3층에는 삼국시대 부장품을 전시하고 있어 두근거린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 나의 눈에 닿기까지 이 물건에 담긴 기억들이 궁금해진다. 시공간을 거슬러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이 갑옷에 손을 대보면 갑옷이 생겨날 때부터 2022년 3월 서울 한복판에 고요한 박물관에 들어오기까지 겪었던 세월을 볼 수 있다면.
똑같이 무덤이 원래 위치인 이 갑옷과 아까 봤던 묘지석과 묘지합에서 느껴지는 불협과는 다르다. 갑옷이 죽은 자를 위하여 부장한 거라면 묘지석은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산 자를 위하여 부장한 차이일까.
새모양토기를 전시해놓은 장면 자체가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어 좋다. 멋진 구성이었는데, 갤럭시로 찍어서 빛만 남은 사진이 되어버렸다. 아이폰을 가져간다는 걸 깜빡했던 날이다.
삼국시대 무덤 속에 들어와 있다가 갑자기 현대로 넘어온다. 어두운 전시 공간에 출구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에 자리한 임민욱 작가의 <새가 날아가서, 나무가 된 나무>가 있다. 새 모양을 한 나무라고 할까, 나무를 이용한 새의 형상이라고 할까. 제목 때문인지 새와 나무 중 어떤 것이 더 비중을 두어야 할지 고민된다. 나무에서 새가 사라져 버려서 오로지 나무라는 물성만 남았다는 뜻일까, 나무가 있는데 새와 함께 있어 다른 무언가(새와 나무)였다가 새가 날아가서 오로지 홀로 나무가 되었다는 뜻일까. 이 작품에서 새는 살아서 지저귀는 활기찬 기운보다는 새시체에 가까워 보인다. 새라기보다 치킨이 되기 직전의 닭장 속에 닭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새가 나무에 담겨있었는데, 이것이 날아가버려서 나무가 되어버린 죽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기 민간인 학살 생존자였던 지금은 돌아가신 채의진 님이 만들고 소장하고 있던 나무새를 유가족에게 기증받아 작가가 재해석하여 만들었다.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새들이 오른쪽 위로 상승하는 느낌이 어떻게든 생의 역동성을 담으려고 한 것 같아 작품에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작품이 탄생한 설명을 듣고 보니 다른(더 나은) 세계로의 차원 이동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이 작품은 임남희 사운드 디자인과 그리고 그림자와 함께 봐야 훨씬 느낌이 산다. 사운드는 속이 빈 나무통을 치기도 하고 종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2층 전시실에 들어가면 드디어 회화 작품들이 있다.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그때 날씨는 어땠는지 기억하고 싶고 기록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고 저장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그랬다. 기억하기 위해 남긴 계회도와 초상화 작품을 볼 수 있다.
채석강도화소는 채용신(1850~1941)이 1923년에 정읍에 차린 초상화를 그려주는 공방이다. 지금으로 치면 사진관, 사진사 개념일 듯하다. 부부 초상화는 마치 결혼사진이나 환갑 사진 느낌이 나고, 좀 더 나아간다면 영정사진 느낌도 난다.
<둔재 초상>과 <전사릉참봉초상>이 좋았다. <둔재 초상>은 내가 바로 꼰대 중에 꼰대, 꼰대 중에서도 왕꼰대라고 말하는 듯하다. 초상화에 휘감겨 이들의 눈을 마주 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호림미술관 특유의 어둡고 국소적으로 밝힌 조명이 더욱 분위기를 오묘하게 한다. <전사릉참봉초상>과 얘기를 나눈다. 1911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110년의 시간 차임에도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 너에 대해 한 번 말해봐. 난 이런 사람이야. 넌 뭐냐?"
조선시대 초상화를 이렇게 집중해서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만큼 흡입력 있는 초상화를 만난 적이 있던가. 조선의 초상화에 관심이 생길 듯하다.
눈을 번뜩이며 나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꼰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활활 드러내는 초상화 건너편엔 좀 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초상 또는 사진이 벽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조덕현 <사람> 작품은 어디서 본 적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2021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에서였다. 다시 보니 조금 다르고 제목도 다르다.
조덕현 작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신체 조건을 조사하려고 지역별로 찍은 사진을 연필로 다시 그린 초상 작업을 한다. 단체 사진 같지만 작가의 선별과 사유가 들어간 회화 작품이다.
전시의 마지막은 사진관이다. 관람객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40주년을 맞이한 호림박물관에서의 2022년의 봄을 '기억'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주용 작가의 <천연당사진관> 은 실제로 있었던 천연당사진관을 매개로 관객이 참여하여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게 한 프로젝트이다. 천연당사진관은 김규진(1868~1933)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1907년 8월 서울 중구 소공동 자신의 집 앞에 개업한 사진관이다. 천연당사진관을 보니 가장 먼저 독립운동가들이 폭탄과 총을 들고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영화 <밀정>에서 공유가 운영하던 사진관이 떠올랐다. 혹시 이 사진관을 모델로 했을까?
매번 끝나버린 전시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뒷북치다 현재 진행형의 전시에 대한 글을 쓰려니 도리어 어색하다. 묵히고 묵혔다 '기억'을 더듬어 쓰는 맛이 있었는데.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도 뒷북을 세게 쳐야 되는데, 양이 너무 방대해 엄두가 안 난다.
호림박물관 개관 40주년 특별전 <기억>은 2022년 2월 15일에 시작하여 2022년 6월 30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