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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26. 2022

현대 미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

'예술을 위한 예술'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현대'가 붙은 대부분의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현대 소설, 현대 시, 현대 연극, 현대 미술...(현대 차 까지도? ㅎㅎ)  몇 안 되는 예외가 있다면 현대 유산과 현대 역사(서양 한정) 정도일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된 이 취향 덕분에 전공 수업에서 거의 '현대' 또는 'contemporain'이란 단어가 붙은 과목은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점을 채워야 하고 시간표상 어쩔 수 없이 몇몇 과목을 들어야 했던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현대 연극'이었다. 지금은 C대학 불문과 교수님이 되신 강사 선생님은 참 좋았지만,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열린 내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꽉 닫힌 결말 애호가). 도대체 왜 이런 희곡을 쓴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까? 그래도 어찌어찌 고도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음 교재였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그 수업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나의 멘토이자 스승으로 섬기며 교류하는 선배는 내 옆에 앉아 고도와 목화밭을 읽으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부조리와 고독을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인생에 대입하여 인문학이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험했었지만, 문학도로서 자부심은 있었음에도 문학의 효용과 의미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는 그냥 너무 머리가 아프고 재미가 없었다.



책 소개에 따르면, 콜테스의 희곡은 일체의 지문이나 무대장치 설명이 '배제'된 텍스트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주의적 탐구를 보여준다. 사뮈엘 베케트는 어떨까.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니지만 구두점을 전혀 넣지 않는 산문 등을 발표하면서 부조리와 허무주의를 표현하였다. 즉, 이전 희곡의 형식'해체'하며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장르를 보여줌으로써 어쩔 수 없는 본질적 허무주의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 특징은 현대미술과도 일맥상통한 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현대가 붙은 대부분의 장르의 예술이나 학문, 그리고 현대미술이 더더욱 싫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 번에 보자마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이런 현대 미술(본 글에서는 우선 현대 미술에 한정) 기피증은 나에게 큰 짐과도 같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물결의 홍수 속에서, 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 미술은 그야말로 구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전 미술을 좋아하는 나 역시 구식이 된 고전 미술과 함께 올드한 것을 좋아하는 올드한 사람, 새로운 것과 진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위 말하는 힙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난 단지 아름다운 것이 좋았을 뿐이었는데. 한때는 내가 정말 뒤떨어지고 뒤처진 사람일까, 현대 미술은 작가의 생각이 담겼다고 하는데 내가 사고의 깊이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고 그래서 내 나름대로 현대 미술과 친해지려고 노력도 해봤다. 일단 현대 미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잘 안 되더라도 현대 미술관 가보기, 현대 미술은 작가의 생각이 담겼다고 하니(물론 고대부터 예술 안에는 작가의 생각이 안 담긴 게 없겠지만 현대 미술은 더욱더) 작가에 대입하여 주관적으로 바라보기 등등.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전보다는 조금 다가간 것 같았지만, 아무리 취향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도저히 현대 미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건축 유산으로 세부 전공을 정하기는 했어도 미술사학과에 적을 두고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이상 현대 미술과의 불편한 동거는 언젠가는 마주쳐서 해결되어야 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finally, enfin! 현대 미술을 이해할 key를 찾게 되었다. 답은 아주 아주 간단했다. 현대 미술뿐만 아니라, 현대 시대를 관통하는 바로 저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무지하게 많이 들어봤지만 (특히 연예인들 전공으로) 뭔지 잘 몰랐던 그것,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을 아는 순간 현대 미술의 난해한 문제도 풀리고 말았다. 물론 좋아하느냐, 받아들일 수 있냐 와는 별개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되어 있고 또 이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모더니즘(modernisme 근대 이후 서구 문화를 형성해 온 특정한 세계관)을 넘어서는 그 이후의(post)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가능성과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던 근대 이성주의와 계몽주의는 그런 인간이 발달시킨 현대적인 과학 기술의 가장 최악의 경험인 제1, 2차 세계 대전으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자리를 채웠고 서구 문화를 형성하고 이끌어온 절대적 기준 대신 진리는 여러 가지며 주관적이라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가 나타났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동안 인간의 억압해왔던 모더니즘을 해체(déconstruction)하자는 것이다.


'해체'라는 단어가 핵심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서 '해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준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를 말하고 싶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생성된 이론인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은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이다. 불어학 수업에서 나를 괴롭혔던... 그는 언어의 구조가 인간의 사고체계이며 언어 체계를 벗어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기호(signe)=기표(signifiant)+기의(signifié) 즉, 뜻과 표시가 연결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단어는 이분법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구조 안에서 자의적으로 결합되었다. 언어학 수업에서 항상 교수님들이 가르쳐주었던 것이 바로 이런 언어의 구조였다. 쉽게 말하자면 닭(사고)이 먼저냐 달걀(언어)이 먼저냐. 이상하게 문학보다는 논리적인 것 같은 언어학 수업(가장 좋아했던 건 라틴어에서 온 어원 수업)을 더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이런 구조주의나 화용론, 등등을 또 좋아한 건 아니었다.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너~무 어려웠는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이후로는 오히려 명확해졌지만(성경에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언어는 창조적이며 초월적이다)... 아무튼 이런 구조주의는 막시즘의 유물론, 가정과 종교 해체, 니체의 허무주의 등과 만나 후기 구조주의가 되었다. 언어는 자의이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진리는 없으며, 언어의 한계성으로 인해 주관적인 해석만 존재하고 언어의 관계성(이분법)으로 생겨난 지배관계로 결국 그 지배관계 생성하게 된 서양 지식체계(aka. 기독교) 해체하자는 것.



프랑스의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퐁피두 센터. 미술관 본관 역시 건물의 본래 기능을 해체하고 만든 해체한 포스트 모더니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파리 시내와 잘 어울리나요?

source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e_Georges_Pompidou_from_the_Tour_Montparnasse_2007.jpg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간 전시회가 작년에 돌아가신 볼탕스키 전시회 in 퐁피두. 솔직히 너무 무섭고 진짜로 속이 안 좋았었는데 현대 미술의 이 개념을 알고 갔다면 좀 달라졌었을까?
미술관 본관 건물은 아예 찍지도 않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찍었겠지...?





여기에는, 우리 학교와 우리 학교에서 분리 독립한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라고 명예 프랑스인에 빙의하며 자랑스럽게 여겼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를 포함,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자크 라캉(Jacques Lacan),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줄줄이 연루(?!)되어 있었다. 하, 프랑스... 어쨌든 탈근대와 해체라는 핵심 개념을 깨닫게 되자 현대 미술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즉, 예술의 모든 정의 해체하기. 일례로 현대 미술의 시작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마르셸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ntaine). 뒤샹은 직접 손으로 조각을 만드는 대신,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인 산업용 소변기를 선택하여 작품으로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병치시켜 사물의 본래 용도를 제거하고 새로운 장르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아이러니'적인 특징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든, 어느 것이든 차용한다. 어울리지 않는 것이든, 여러 양식의 이미지와 느낌, 상징들을 결합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즉, 꼰대처럼 가치 운운하는 진부한 소리 하지 말라는 뜻. 이 글을 쓰는 데,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예술과 영혼>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역사마저 강탈 대상이 된다'. 따지지 말고 웃어넘기라는데 왜 갑자기 디즈니가 생각이 나는지?



현대 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속성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라고 하고 싶다. 이 표현의 기원이 된 개념은 19세기에 생겨난 유미주의(esthétisme) 혹은 예술지상주의와 연결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 즉 초월적 존재로서의 예술을 의미한다. 뭐 그것도 낭만주의에서 왔으니 연결된다면 연결될 수 있겠지만... 예술(art)과 기술(technologie)의 그리스 어원은 '숙련된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é)인데 당시에는 기술과 예술을 모두 통칭하던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조하고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예술과 기술의 시작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세에서 예술은 종교에서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예술가는 교회와 작품에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무명의 장인에 불과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소위 말하는 천재들이 등장했지만(당연히 그 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 좋은 장인이었다. 이후 낭만주의자들이 예술가에 천재성을 부과하였다. 그들은 선택받은 소수의 특별한 자들이며, 그들의 예술은 다른 활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행위가 되었다. 르네상스 천재에게 천재라는 개념을 부과한 것도 이 후손들이었다. 그렇기에 '천재'가 '예술'의 영감을 받기 위해 하는 일탈이나 혹은 천재가 만든 작품은 그 표현이나 묘사, 방식, 사상이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솔직히 나에게조차도 이런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예술가니까 그럴 수 있지~ 예술이니까 이해해야지~ 그래서 현대미술은 진보적이고 트렌디한 것?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문제가 아닐까? 내가 교양이 없어서? 내가 사고가 부족해서? 시대에 뒤처진 취향이라서? 결국 예술은 그 자체로 예술이니까?점 하나를 찍어놓은 게 무슨 그림이고 예술이야? 그치만 이건 천재의 그림이니 범인인 내가 뭘 알겠어... '






그렇다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고 주장했던 중세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예술은, 미술은 엄연히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이고 이전 것을 문제 삼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역사는 전개되어 가니까. 과학의 발전 과정처럼. 다만, '현대 미술을 위한' 수많은 변호인단은 있지만, '현대 미술을 싫어하는' 혹은 '현대 미술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변명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현대 미술을 바라보는 눈이 괴롭고 속이 거북하고 갑갑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즉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원하는 당신의 취향은 구닥다리가 아니라는 것. MZ세대의 놀이터가 됐다는 '아트 페어'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도, 당신은 예술 애호가의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 결국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아, 내가 나에게 스스로 건네는 위로의 말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범람하는 수많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상을 강요받는 폭력을 당하지만 의미있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내가 건네는 위로가 아닌, 한 미술 비평가(Brian Sewell)의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논평으로 진짜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베처먼(John Betjeman 영국 계관 시인. 빅토리아 시대 애호가였으며 파괴 위협을 받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기념물 보존을 위한 Victorian Society를 설립했다. 이런 건축에 대한 뛰어난 안목으로 건축에 대한 여러 책도 남겼다)을 인식하는 데는 실패했다. 즉, 교양 있고 세련된 현대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완벽한 논리와 조화, 비례에 대한 본능적 요구뿐만 아니라 '감상'이라는 괴물 역시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벽난로,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나는 초인종, 떡갈나무 대들보, 납으로 만든 가스등 그리고 조지아 양식의 박공 딸린 현관(로코코식의 화려한 장식 스타일) 등에 대한 애틋한 향수가 완벽한 닭장(르 코르뷔지에의 현대식 아파트 빌딩)으로는 달래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힐러리 브랜드, 아드리엔느 채플린, <예술과 영혼>, IVP, 2004, p.35





빅토리아 양식 건축물.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

source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_Pancras_Railway_Station_2012-06-23.jpg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에서 소개하는 조지아 양식 인테리어. 하, 나 진짜 이런 데서 너~~무 살고 싶은데?!

source : https://www.nationaltrust.org.uk/lists/georgian-interior-design



르꼬르뷔지에의 Unité d'habitation. 비평가가 말한 닭장이 이걸 말하는 것일 텐데. 건축사적 의의는 알겠지만 둘 중 고르라면 당연 조지아 스타일에서 살고 싶지 않나요?

source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seille_cite_radieuse_fac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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