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리뷰
프랑스에서 나의 강점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모국어를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적용되지 않아 당황했다. 파리 거리에서 줄기차게 연습했던 '마이즈너 연기법(반응 훈련)', 무대 위에서 존재하는 것 등은 오히려 말이 자유로워지자 어려웠다. 불어로 연기할 때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 연습실과 무대에 서는 모든 순간 나의 촉과 더듬이를 바짝 세워야 했다. 특히 동료들이 연습할 때마다 동선과 대사를 다르게 준비해 와서 진짜로 듣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었던 상황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노력 없이도 대사가 잘 들렸다. 상대에 집중하지 않아도 반응할 수 있었다. 익숙하고 능숙한 모국어 사용이 되려 진짜로 듣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한국말을 오히려 못 듣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나의 촉과 더듬이가 둔해졌다. 아! 산란은커녕 도태인가?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07쪽
20대의 마지막을 파리에서 지내는 행운을 누렸다. 30대의 새로운 무대는 한국이다! '회귀하는 연어, 바다에서 성장했으니 이제 내 안의 것들을 쏟아내려 태어난 곳으로 가자!' 이미 프랑스에서 적응한 탓에 한국에 가면 또다시 이방인 기분을 느끼게 될 듯했다. 한국행을 결정하고 나니 프랑스의 낭만이 물밀 듯 내게 흘러들어왔다. 유학 막바지에 나는 에펠 탑 근처로 이사했다. 집으로 가던 눈길 쌓인 고즈넉한 골목길을 걸으며, 내 삶의 한때를 누렸다. 시간 맞추어 점멸하는 에펠을 보며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 어느 겨울의 차가운 쇼윈도도, 늘 걷던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근처의 카페도 모두 따스함과 그리움이 덧입혀졌다. 귀국을 결정했으나 익숙한 생활과 파리의 낭만이 나를 붙잡았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07쪽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공연을 하고 싶었다. 허공을 방황하는 그 눈빛이 공연장에 돌아오기를 바랐다. 물론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그분의 눈은 공연장 어딘가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내가 극의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도 내가 연기하는 말 한마디에 진실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공연장에서 방황하던 눈빛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깐의 위로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지인의 말이 내게도 힘이 되었다. [...]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극장을 나서며 마음이 풍성해졌다고 말하면 그것도 괜찮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심을 담아내자' 진부해도 진심이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34-135쪽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9절-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