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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Jul 29. 2021

김기덕 영화를 알려준 너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 묶음 3

DEAR. O


생각해 보면 너는 나에게, 방금 하이틴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어. 아직 모든 것이 어설프던 내게 너는 동갑이었지만 언니 같았고 나는 네가 하는 말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었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도 너도 정말 갓 어른이 된 어설픈 성인이었지만 네가 말하는 세상, 보여주는 것들 모두가 내게는 신기하고 멋져 보였어. 


난 당당한 네 모습이 정말 놀라웠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필요할 때마다 척척 말하고 주변 공기를 너에게 집중시키는 그 모습이 대단해 보였고 나도 닮고 싶다고 생각했어. 가끔 보여주는 약한 모습들까지 완벽해 보였어. 그 모든 것이 너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플롯 같이 느껴졌고 난 너를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다. 너는 늘 내게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좋은 거다. 너는 이래야 한다. 이게 너에게 좋은 방향이다. 등의 말을 해 줬고. 나는 그게 우정이라 생각했어.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엔 친구 사이에서의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말이야. 


너는 다 니 멋대로였어. 다른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함께 있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에게 중요하지 않았지. 반대로 나는 점점 너를 신경 쓰게 됐고 너를 배려하느라 바빴어. 물론 이 모든 것은 내가 쓰는 우리니까 실제와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고.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이건 꼭 봐야 한다'며 네가 보여줬던 그 많은 김기덕 영화들이었어. 제대로 된 가구도 없이 MDF로 만들어진 공간박스로 꾸민 그 자취방에서 우리는 그 불쾌하고 끈적이는 김기덕 영화를 3편이나 이어서 봤던 것 같아. 나는 충격을 받았고 조금은 영혼에 상처가 생겼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나를 붙잡고 이 영화가 왜 예술적인지, 저 장면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 인물이 어떤 상태인지 구구절절 씨네필마냥 읊어댔지. 그것들이 다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사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은 기억나지도 않아. 그 영화들이 너무 내 영혼을 줘 팼달까? 평생 안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덕분에 나는 그 영화들을 다 보고야 말았네. 너는 그 영화들 기억나니? 사람을 성폭행하고 학대하고 때리고 죽이고 죽던 그 영화들이 너에게 아직 남아 있니? 아직도 그 영화들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지 가만히 앉아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그러기엔 조금 피곤하다. 


네가 알바를 하던 옷가게는 유독 이-상한 옷들을 많이 팔았어. 원색으로 된 쫄쫄이 바디 수트라던가, 형광색 땡땡이 비키니라던가, 가슴을 겨우 가리는 원색의 탱크톱 같은, V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V 옷을 파는 그 가게에서 너는 종종 직원 할인으로 옷을 사 와서 내게 주곤 했고 급기야 나에게도 그 쫄쫄이 바디슈트가 들리는 날이 왔지. 네 카메라 앞에서 나를 포함한 너의 친구들은 그 옷들을 입고 V한국 정서에 맞지 않지만 쿨한 미국 하이틴의 잠깐의 일탈V 같은 컨셉으로 사진을 찍었고 나는 심지어 그 순간이 즐겁기도 했어. 그런데 얼마나 다행이니 다행히 그 사진들은 잊히고 사라져서 인터넷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와 내 주변에선 사라졌어. 휴. 그때는 흥겨웠지만 지금 보면 끔찍하겠지. 그렇게 너는 남달랐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어. 


우리가 왜 안 보게 되었는지 기억해?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서 되짚어 보려고 해. 내가 본가에 내려가 있는 며칠이 있었어. 나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집을 정리해 두고 본가에 내려갔고 그맘때쯤 조금 뜸해진 사이였던 너의 연락을 받았어. 서울에 올라가 있게 되었는데 며칠만 우리 집에서 지내면 안 되겠냐고. 그러라 그랬지. 내가 없는 집을 내어줄 만큼의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네가 나 없는 우리 집에서 며칠을 지내고 본가로 돌아가고 나는 서울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어. 그런데 알잖아. 집이 뭔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더라? 분명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지. 옷장 문을 여는데 침대에 문이 걸려 열리지 않더라? 충분히 옷장이 열리는 공간이 있었는데, 얘가 자다가 침대가 좀 밀렸나 싶어서 제자리로 옮기려고 들어 내는 순간. 

콘 돔 포 장 지를 보게 된 거지. 

포장지였으니까 다행이었던 걸까. 제법 놀라긴 했지만 우리 사이의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싶었어. 은근슬쩍 물어보면서 놀려줘야지 싶었어.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너 혼자 있었어?라는 내 질문에 넌 불같이 화를 냈지. 당연하지 않냐며 왜 그런 거 묻냐며. 다시 한번 정말이냐, 지금 말하면 다 용서해 줄게^^. 하는 뤼앙스로 말을 걸었는데 더 역정을 내는 너를 보며 나도 화가 났어. 

그런 생각이 들더라. 왜 이렇게 화를 내지? 부끄러워서 그러나? 그래도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다 알고 있다는데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사과해야 하는 거잖아? 나를 어떻게 봤길래? 나를 시녀로 생각하나? 우리 집이 모텔인가? 내 침대는? 내 침구류는? 

끝까지 부인하는 너에게 그동안의 맘을 다 쏟아내게 되더라. 너는 놀랐을 거고 당황스러웠겠지 그렇게 나는 너와의 연락을 끊었고 그 후 편지를 받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았어.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가 군대를 가는 길에 마지막 며칠을 함께 했고 그게 우리 집이었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어. 안녕. 그렇게 몇 년의 인연이 똑 하고 쉽게 끊어지더라. 


그러니까 이별은 하나의 사건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야. 그동안의 생각들이 밀려와서 쌓여 있다가 이별이라는 핑계로 와다다다 쏟아 내고 그 민망함에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거였어. 다른 많은 이별들도 있겠지만 너와의 이별은 그랬어. 


지금의 나라면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어도 조금 더 쿨하게 넘길 수 있을까? '그래 그럴 수 있지 하하. 다음번엔 마무리 처리까지 제대로 하라구 친구~ 하하' 하면서 찡끗 웃을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너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면 너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마음의 빈자리를 큰 소리로 채워 넣어서 부풀린 사자 갈퀴 같은 너의 몸짓들을 안쓰러워하며 안아줄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시야가 좁았어 너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위에 내 멋대로 너라는 사람을 만들어 덧칠해서 의지하고 기대고 어울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미안하고. 뭐 그래. 


너의 소식은 정말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네. 알아보려면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에너지가 없었어. 나도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아등바등하니까. 애써 웃고 애써서 소리 내던 니 모습이 지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안정되었길 바란다. 소란하지 않아도 너라는 사람이 완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길 바라. 

나는 아주 잘 있어. 그때보다 화가 많아지고, 싫은 것들이 구체적인 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나를 온전히 긍정하며 살고 있어. 이렇게 서로 잘 살자. 그렇게 각자의 삶을 마저 잘 살아낼 수 있길. 

그러자. 


너의 부하? 시녀? 같았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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