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않을 편지 묶음 2
DEAR. H1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 먹고서 너에게 꼭 편지를 써야 겠다고 생각했어.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정리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잘 지내지? 나야. 19살이었던 너보다 한 살 많았던 나. 연인이었던 나.
그러게, 생각해보면 연상연하 커플이 거의 없던 때 우리는 한살 터울의 연인이었네. 나는 약간 대장기질이 있어서 너를 만나면서 '아 이게 내 적성이구나!' 싶었어. 누나 누나 하던 니가 어느날 내 이름만 덜컥 부르는 순간의 희열이라던가, 귀여워 하던 니가 불쑥 '나도 남잔데!' 하는 순간을 발견하는 재미라던가. 그런 것들. 말하진 않았지만 내겐 그런 것들이 우리 연애의 맛이었어.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은 아니고 걍 재수하는 누나였는데 우린 서로 뭐가 좋아서 만나게 된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넌 그냥 학생이 아닌 성인인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거고 나는 그냥 귀여운데 말 잘듣는 이성에 대한 호감이었던 것 같아.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야. 그때는 너도 나도 뭐 럽온마핱 인줄 알았지만.
너랑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물론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귀기 전 너랑 나랑 학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일이야. 주로 우리가 함께 있었던 건 피아노 방이었던 것 같지? 수업이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빈 연습실에서 내가 피아노를 치거나 MR을 틀어놓고 노래를 연습하고 있으면 너가 스윽 하고 들어와서는 같이 연습하자 그랬잖아. 어느새 내가 네 악보를 놓고 반주를 해 주고 너가 노래하고. 들어주고 20살 재수생이 뭘 안다고 코멘트 해주고 넌 또 그게 뭐라고 귀 기울여 듣고. 그랬다. 그랬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 순간은 하이틴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마냥 남아 있어. 검정 피아노에 앉아서 악보를 보며 건반을 누르는 나와 내 옆에 선 채로 교복위에 짚업 후드를 걸친 네가 악보를 함께 보며 호흡을 맞추던 순간. 딱 스무살에 남길 만한 예쁜 기억이랄까.
예쁜 기억이야기 하니까, 사진 처럼 남은 한 장면이 또 있지. 늦은 밤 집에 가던 길이었던 것 같아. 공연을 함께 봤던가 그랬어. 공연을 보고 나왔더니 비가 오고 있었고 나는 우산이 없었지 뭐야. 세상 클리쉐지만 너와 함께 우산을 쓰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 버스 정류장 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늘 그랬듯 서로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그러고 내가 먼저 버스를 탔고 잠깐 서 있다 돌아가는 너를 봤어. 그런데 니 한쪽 어깨가 흠뻑 젖어 있더라고. 우산이 작았는지 니 어깨가 쓸데없이 넓었는지. 아니 어쨌든 그 너의 젖은 한쪽 어깨가 참 좋았어. 너는 축축했니. 몰라 나는 그랬어. 맘 속에 나비가 날아다닌다 그러잖아. 딱 그랬어.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았고. 아직도 기억해.
그런데 말이야. 모든 연애가 그렇듯 이러고 저러고 하다 보면 헤어지게 되잖아. 우리는 뜨거운 입시철이 지나고 나니 좀 시들해졌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뭔가 아쉽긴 하지만 누구를 탓 할 수도 없게 그렇게. 페이드 아웃된 우리의 연애. 좋은 음악은 여운이 남도록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 하잖아. 그런데 연애는 페이드아웃이 되니까 전혀 여운도 안 남고 깔끔하던데 나만 그래? 그래,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나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봄이 되고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면서 간간히 너에게 연락은 왔었지. 근데 미안. 나는 그 사이에 다른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세상일 다 그런 거 아니겠니. 20대에 뭘 못해. 너도 그랬을 거라 생각해.
재밌는 부분은 여기지. 기억해? 나는 네 전화를 받았던 장소도 기억해.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있었고 왼쪽 창가 자리였고 비가 오는 날이었어. 창가에 남겨지던 빗방울의 모양도 기억이 나. 우리가 헤어지고 2년이 지났고 가끔 문자는 왔었지만 전화가 온 건 낯설었어. 우리는 안부를 물었고 너는 조금 우울한 듯 했어. 너는 만나자고 했고 나는 거절했던 것 같아. 싫었거든. 막 몸서리쳐지게 싫진 않았지만 '굳이? 지금? 너를? 왜?'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 계속해서 거절하는 나를 회유하고 농담하고 그러던 네 입에서 불쑥 그말이 나왔어.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 말을 듣고 처음 했던 생각은 '얘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나?' 였어. 한동안 뜸하던 놈이 갑자기 사랑고백이라니 그 정도의 사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감정의 흐름 아니겠어? 그리고 나서 했던 생각은 '술을 엄청 먹었나 보다' 였어. 생각이 여기에 닿으니까 불쾌해지더라. '맥락없는 사랑고백이라니 그것도 취해서, 지나버린 연인에게 이딴 무례한 짓을?' 그런 맘에 서둘러 통화를 정리하고 놀랍게도 나서 나는 며칠을 괴로웠어. 나도 참 귀여웠다. 정말로 나에대한 마음이 남은 건 아닐까. 나를 정말 오랫동안 생각했나.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나야 할까? 만날까? 까지 생각했지. 하지만 꾹 참고 지난 일은 흘려보내는 선택을 했는데 정말 그때의 나. 현명했어.
며칠 후 너 군대가더라?
모든 것들이 명료해 지는 순간이었달까? 군대가기 전 20대 초반 남성의 최선이었을까. 어떻게 한번, 지난 연인이라도 군대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맘이었겠지. 당시엔 그걸 알고 나서 친구들이랑 3개월은 니 이야기로 술 먹었어. 그만큼 불쾌하셨다는 거지. 그치만 지나고 보니 너도 참 안쓰럽다. 얕고, 간절하긴 했었나 보다 싶고.
그래서 잘 지내지? 결혼했다는 소식이 내가 전해들은 너의 마지막 소식이었어. 생각보다 빨리 결혼하더라구. 내 주변에서도 너의 결혼이 가장 빨랐던 것 같아. 미련이랄까, 아쉬움이랄까 그런건 하나도 없어.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은 예쁜 그림으로 몇 장 남았고 그 순간들에 많이 고마워.
나는 잘 지내. 니가 알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어. 그때의 나는 많이 상처받고 많이 울기도 하고 그랬지? 지금의 나는 좀 달라. 그렇게 됐다.
딱 좋은 시절에 딱 좋은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지금의 니가 행복하길 바라.
너의 첫 성인여자친구였던 사람으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