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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Apr 08. 2021

코로나 백신을 양보할 수 있는 사회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걸까, 신뢰가 살아있는 걸까

백신 1차 접종을 맞았다. 며칠 전 저녁에 갑자기 문자가 왔다. 다음날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백신 접종 이벤트가 있는데 자리가 많이 남았다며 자격 무관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신청하도록 했다. 모더나 백신이라고 했다. (오늘 또 열렸는데 오늘은 화이자라 한다.) 바로 예약하고 다녀왔다.


미국에서 흔히 보기 힘든 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신분증이나 서류를 내도록 했지만, 확인하는 사람은 일절 없었다. 백신 접종 후 주는 접종 증명 카드에도 2차 접종 날짜가 써져있을 뿐, 본인 이름도 알아서 쓰라고 했다. 이래서 가짜 접종 증명서, 가짜 백신 여권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어쨌든 줄 서는 시간을 포함해서 백신을 맞고 15분간 기다리고, 이 모든 걸 다 합쳐서 30분 이하로 걸렸다. 하루가 지난 지금 주사를 맞은 부위가 조금 묵직한 근육통이 있을 뿐 아직은 별다른 부작용은 없는 듯싶다. 2차 접종일은 4주 후인 5월 4일이다.

앞쪽에서 예약확인, 서류 제출, 백신 접종하고 뒤에서 15분간 기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주는 인구가 많아 타주에 비해 접종 자격 완화가 늦게 이루어진 편이다. 그렇다 해도 4월 19일이면 누구나 다 백신 접종을 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한 달 전부터, 백신 맞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백신을 재빠르게 배포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접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흡연자다"라면서 들어온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사를 맞았다. 하긴 그 자리에서 엑스레이를 찍겠는가, 주치의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하겠는가. 알레르기나 천식을 앓고 있는 아이의 부모들 중에서, 증상이 아주 경미한 경우에도, 의사로부터 '장애자를 돌보는 무보수 간병인'이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백신을 맞는 경우도 여럿 봤고, 병원이나 요양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맞을 수 있어 백신을 위해 단발성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까지는 놀랍지 않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그들이 법이나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니다. 살짝 애매한 틈이 있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이 '틈'을 활용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하나같이 "더 약한 사람들, 더 급한 사람들, 더 위험한 사람들"이 자기보다 먼저 맞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65세 이상의 고령군이 코로나에 특히 취약하기 때문에, 암이나 면역질환 같은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겐 더 치명적이니까, 또한 재택근무를 할 수 없고 매일 나가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필수 업종 사람들은 감염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본인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백신을 못 믿어서, 백신의 부작용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순서가 먼저 돌아가도록 평화롭게 기다리는 이들.


아직은  사회에 신뢰와 원칙이 살아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어쩌면 결국 곳간에서 인심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일 당장  애매한 틈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백신을 맞지 않으면  차례가 기약 없이 늦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서 양보할  있었을까. 이제까지 물자가 풍부했던 미국은, 억척을 떨지 않아도, 조금 양심에 애매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금세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자원이 돌아갔기 때문에 양보라는 '여유' 부리도록 학습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곳간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걸까.


곳간에서  인심이든 학습된 여유든, 이러한 약속과 신뢰가 오래오래 남아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날이 늘어나는 아시안 혐오범죄는  반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같아 슬플 뿐이다.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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