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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익구 Oct 24. 2021

도롱이

  비오는 날 아버지의 발걸음은 더욱 바빴다. 비바람이 부는 새벽부터 도롱이를 쓰고 물꼬를 보러 들로 나갔다. 도롱이는 짚으로 겹겹이 엮은 우장이다. 어깨에서 허벅지까지 내려오도록 만든 것으로 아랫도리를 젖지 않으려면 바지를 걷어 잠방이를 만들어야 했다. 머리에는 맥고자나 우산을 쓰기도 하지만 우산보다 모자를 써야 두 손이 자유로웠다.

  비바람이 치는 들판은 여름이라도 어슬어슬한 한기가 찾아오지만 도롱이를 어깨에 두르고 앞섶의 끈을 동여매면 웬만한 찬 기운은 막아주었다.

  아버지는 짚으로 멍석도 만들고 가마니도 짜고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만들었지만 우장은 당신 것 딱 하나만 만들어두고 비오는 날 들에 나갈 때 쓰곤 했다. 식구가 여럿인데 왜 우장은 단 하나만 만들었는지 어릴 때는 궁금하기만 했다. 비오는 들판에 우장을 쓰는 일은 당신 혼자면 족할 뿐 어느 누구도 도롱이를 씌워 밖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처럼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일찍이 들로 나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속살까지 파고들 것 같은 장대비에 짚으로 만든 우장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궁금했지만 온몸이 젖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것을 보면 체온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도롱이의 임무는 다 하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날 들에 나가지 않을 때 아버지의 솜씨는 한층 빛이 났다. 부러진 농기구들을 새것처럼 고쳐놓기도 하고 짚으로 소쿠리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물꼬를 보기 위해 아버지가 들고 다니는 삽은 우리의 키를 넘기는 긴 자루를 다듬어 끼웠다. 비가 오면 허리까지 차오르는 안들 도랑을 건널지도 모르기에 작대기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짧은 자루 삽은 아버지의 훤칠한 키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기도 했다. 일을 잘하려면 연장이 좋아야 하고 자세가 중요함을 일러준 아버지의 교훈은 매사에 격국이 맞아야 순행한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도롱이에 긴 자루 삽을 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갑옷 입은 장수를 연상케 했다. 외양간 한구석에 걸려있던 도롱이는 초라하기보다 여름 들판의 비바람을 이긴 공로 트로피 같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번개가 번득이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전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처럼 아버지의 도롱이는 그렇게 세파를 이기고 내 어린 시절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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