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들에 나가실 때는 지게를 지고 나갔다. 낫이나 호미는 밀삐나 탕갯줄에 끼우기도 하고 자루가 긴 괭이나 곰배는 지겟가지에 걸친 후 지게꼬리로 묶어가기도 했다. 가지에 걸쳐지지 않는 거름을 질 때는 싸리나무 소쿠리를 얹은 바지게를 졌다. 싸리나무로 엮은 바소쿠리는 무게만 해도 한 짐이나 되기에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접어두었다. 지게를 질 때 주의할 것은 짐의 좌우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뒤뚱 걸음이 되고 자칫하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평소에 바지게를 얹지 않는 이유도 무게와 균형 때문이다.
안들 상답이라 해도 산동네 다랑논 마냥 구불구불하고 좁은 논둑길에 수레를 끌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추수철 볏단을 옮기려고 마른 논에 손수레를 넣기도 했지만 물렁물렁한 논바닥에 바퀴가 빠져 짐을 나르기는 쉽지 않았다. 요즈음은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모두가 기계를 이용하지만 지게를 져야했던 시절, 기계가 들판을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게가 아니면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짐을 나를 수밖에 없었다. 몇 도가리의 논을 거쳐야하는 가운데 논에 거름을 넣거나 비료들을 운반할 때는 지게만큼 편리한 것이 없었다. 6·25전쟁 때는 전쟁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지게부대가 있었다고 하니 지게는 다양하게 이용되는 도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이나 주차장 같은 곳에서는 지게를 진 짐꾼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을 만큼 우리 생활의 필수 도구였다.
하루 일이 끝나고 해거름이 되어 집으로 오는 아버지의 지게위에는 피로가 한 짐이나 되어 보였지만 엷게 퍼져가는 노을의 빛깔만큼이나 평온함도 함께했다. 귀갓길 지게위의 짐들은 철마다 모양이 달랐다. 가을 철이면 무댕기 나락단이 얹혀 있기도 했고 여름에는 쇠꼴이 가득하기도 했다. 아무런 수확물이 없는 봄날에도 지게는 아버지의 등을 지키고 있었다. 텅 빈 지게 위에는 정성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갔던 어머니의 새참 바구니가 얹혀있었고 한 발짝 뒤따르던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가도 ‘실담 없는 소리’하고는 핀잔을 주거나 한 번씩 힐끗 돌아보는 것으로 큰 선심이나 쓴 듯한 대꾸를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런 엄마의 잔소리가 싫지는 않았는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다.
농번기 가정실습 때면 아버지를 따라 들일을 거들었다. 모내기 때에는 모춤을 논 가운데 여기 저기 던져두기도 하고 못줄을 잡기도 했다. 못줄 잡는 일은 특별한 기술이나 힘든 일이 아니고 가로 줄과 새로 줄의 눈금을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일꾼 한사람 몫을 했다.
모내기철 귀갓길 아버지의 지게위에는 여느 계절보다 피로가 무겁게 누르는 것 같았다. 새벽 일찍 들로 나간 초여름 따가운 햇볕 속의 하루는 너무나 길었다. 모춤을 가득 졌을 때는 모든 무게를 어깨끈과 등태에 실어야하기에 허리를 약간 숙이고 작대기를 짚어가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일과 후의 빈 지게를 진 모습은 느슨하기만 하였다. 가볍기도 하지만 종일 쌓인 피로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은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방은 나의 필수 도구였다. 아버지의 지게처럼 출근 할 때는 반드시 가방을 들어야 했다. 별로 가져갈 것이 없어도 빈손으로 나가면 허전하기만 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가방 속에는 혹시나 쓰일 지도 모를 물건들을 넣어 두기도 했지만 한 달이 되어도 쓰이지는 않았다. 어쩌다 가방을 놓고 왔을 때 그것들이 필요하여 무척 아쉬웠던 경험들이 있기에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든든하기 때문이었다. 가방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 요즈음은 지게처럼 어깨에 메고 다닌다. 집을 나설 때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나온다.
들판에 나갈 때면 언제나 그림자처럼 아버지를 따라다닌 지게와 나의 한쪽 어깨에 걸쳐진 가방이 무엇이 다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해질녘 한쪽 어깨에 걸쳐진 아버지의 빈 지게 위에 붉은 노을과 함께 어머니의 새참바구니가 달그락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