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익구 Nov 20. 2021

메콩강의 메아리

매일 새벽 해가 오르기 전,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아

저녁이면 모깃소리 같은 방송을 듣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라디오가 없어서 꼬깃꼬깃 모은 용돈으로 외장형 스피커가 없는 리시버라는 수신기를 샀다. 손가락만 한 리시버는 수신 능력이 떨어져 높은 안테나가 필요했다. 바지랑대 끝에 철삿줄을 묶어 높이 세우고 리시버 안테나선에 겨우 연결하여 가늘게 방송을 잡을 수 있었다. 뉴스 속의 ‘월남 소식’에 이어 ‘메콩강의 메아리’라는 저녁 방송을 듣기 위해서였다.

  “맹호부대 000 님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는 사연입니다.” 월남으로 파병 간 군인들의 사연들이 소개되고 신청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십자성부대로 월남에 간 큰형의 사연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리시버를 귀에 꽂고 기다리다 잠든 일이 허다했다. 영화관에 가도 월남 소식은 ‘대한뉴스’의 주요 부분이어서 언제 보아도 씩씩한 군인들의 무용담을 쏟아냈다. 월남 뉴스 대부분은 어떤 지역을 탈환했다거나 베트콩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의 승리 소식이었다. 이런 승전보가 나오면 영화관은 박수 소리로 요란했다.

  중학교 일학년이던 1966년 여름, 큰 형님이 월남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형님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1차 파병 지원 때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는 알리지도 않고 월남 전선으로 지원을 한 것이었다.

  형님이 월남 파병에 지원한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세계에서 최빈국이었다. 세계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29달러였으니 220달러인 아프리카 튀니지보다 가난한 나라였다. 형님이 보내온 한 달 봉급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은 우리나라 돈으로 일 만원에서 일만 사천 원 전후로 편지와 함께 우체국 소액환으로 배달되었다. 50여 년 전의 일만 원이면 지금 어느 정도가 될까? 버스비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약 3백만 원 전후가 될 것 같은 계산이 나온다. 이러고 보니 당시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죽지만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님은 편지 속에 전투병이 아니라 후방의 보급 담당 부대에 근무하므로 안전하다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붉은 테두리가 있는 항공우편만 보면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셨다.

  처음에는 큰 형님이 월남 간 이야기를 친구들에게도 할 수 없었다. 군부대의 높은 사람이 지프차를 타고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위문품으로 학용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내가 위문을 받아야 할 가엾은 아이 같은 생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수시로 큰아들 걱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시니 나도 덩달아 슬펐다.

  그 후에도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월급봉투가 오면 돈을 찾아오는 일은 내가 했다. 어떤 때는 우체국의 돈이 모자라 오후에 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우체국 잔고를 다 털어도 안 될 만큼 큰돈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나의 영웅이었던 큰 형님은 매달 월급봉투와 편지를 함께 보내왔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일학년이었던 나에게 그 큰돈을 찾아오라고 한 것을 보면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한 번도 돈이 얼마 왔느냐를 먼저 물어본 적은 없었다.

  매일 새벽 해가 오르기 전,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아 비는 모습은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어미의 간절한 절규 같았다. 월급봉투가 들어있는 편지가 온 다음 날은 더욱 정성껏 음식을 지어 정화수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아 온지라 혼자서도 대충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고 조상님들 성주님 시조님들 우리가 무얼 알겠습니까. 아무튼 우리 대주님……, 월남 간 우리 큰아들 그저 아무 탈 없이 돌아오도록 해주시고……. 우리 둘째, 우리 막내아들……, 이 모두가 조상님들 덕인 줄 아오리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어머니 구호댁은 그렇게 빌고 나면 한결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은 형님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아마도 큰 형님이 건강하게 귀국한 것은 어머니의 정성이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나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큰형은 그렇게 월남전의 영웅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고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다.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큰 형님의 편지 속에 나왔던 그곳을 더듬어 보며 수류탄을 양쪽 어깨에 걸고 찍은 용맹한 전사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작가의 이전글 가마니 짜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