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한 1966년 그해 추석은 9월 29일 목요일이었다. 하루 전인 9월 28일은 서울수복의 날로 일부 학생들은 시가행진에 참석하고 일부는 포항 육거리에 있는 시공관에서 기념식 행사를 했다. 나는 시공관 행사 팀이었다. 뻔한 행사에 동원된 중 1년생의 초롱초롱한 기억력에도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날이 추석이라 집에서 심부름할 일도 많은데 관 주도의 행사에 동원된 학생들에게 서울 수복이란 것을 상기시켰지만 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명절 전날은 음식 준비에 바쁜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과 잔심부름이 내 몫이었다. 차례상에 올리는 산적을 다듬어 꿰는 일은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명절은 기제사와 달리 아침에 차례상을 올린다. 차례를 지내기 전에 멍석을 깔고 제상을 닦는 일은 형이 담당했고 과일을 깎고 밤을 치는 일은 사촌 형이 맡았다. 한지를 접어 붓으로 지방을 쓰는 일은 작은아버지의 역할이었다. 벌초하고 차례를 모시는 일들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했다. 그런 행사로 인해 한 자손임을 일깨워 끈을 이어주었다.
오늘부터 4일간의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역할을 분담했던 많은 분이 이제는 위패에 기록될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어쩌나! 위패를 놓아야 할 차례상조차 없으니 말이다. 부모님 산소 이장 문제로 큰형수와 고성이 오간 후 장손인 큰조카가 의논 한번 없이 제사를 다 가져가 버렸다. 형님이 안 계셔도 장손이 조상을 모시겠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세 살 많은 중형까지 있는 막내로서는 형님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내려오고 사위의 해외 출장으로 딸과 손녀가 같이 있어도 어른들이 없는 추석은 명절 기분이 안 난다. 이젠 내가 그 어른의 자리에 있지만, 대가족을 이끌어온 내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을 따라갈 수 없으니 명절만 되면 쓸쓸한 기분은 해마다 더해진다.
문명의 발달로 세태가 바뀌고 옛 풍속들마저 사라져가니 아쉽기만 하다. 함께하는 명절, 없어도 나눌 줄 아는 그런 훈훈한 명절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나만의 희망 사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