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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Julie Jul 10. 2020

과장님, 저 오뎅 사주세요

나는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시는 말 그대로 '알쓰'다. 소주 한잔이면 얼굴부터 발끝까지 불타듯이 빨개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는, 거짓말 조금 보태어 소주 냄새에도 취하는, 그야말로 최고 난이도의 알코올 쓰레기 말이다. 이러한 증상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나도 시도는 해봤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 쓴 맛이 달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몸에서 이리도 격하게 거부반응까지 해대니.. 결국 서른이 훌쩍 넘는 오늘까지 그야말로 알코올 청정 몸뚱이를 유지하는 중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에 마음이 막히는 날들에는, 소주 한잔의 위로를 모르고 사는 것이 서럽지 않을 수가 없다. 삼겹살에 소주, 막걸리에 파전, 치킨에 맥주. 이런 환상 궁합의 맛을 모르고 사니,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것일까, 진짜 인생의 맛을 모르는 것일까.

대학교 때 그 어린 나이에 조금씩 술을 부어가며 배웠어야 했는데, 통금 10시를 철통처럼 지키던 아빠 덕분에 그마저도 어려웠다. 여러 개의 동아리와 대외활동을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대학생활의 참 맛도 모르고 졸업을 하고 회사라는 곳에 입사를 했더니, 아니 주량이 이렇게나 중요한 회사생활의 핵심역량인지 나만 몰랐단 말인가! 최종 임원면접에서 사장님이 던진 마지막 질문이 '주량이 얼마인가' 였을때 눈치를 챘어야 했나 보다. 

여기서 가장 반전은 내 얼굴이 누가 봐도 대단한 애주가인 것이다. 대학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술을 전혀 못 마신다고 하면 국적 성별 나이 불문 다들 첫마디가 '에이~ 거짓말'이다. '딱 봐도 소주 짝으로 마시게 생겼구먼 뭘'도 아주 흔히 수도 없이 들어본 말이다. 내가 나를 봐도 그러하기에 기분 나쁘게 듣지도 않는다. 그러니 누가 봐도 내가 술을 한 모금도 못한다는 건 뻔한 내숭이거나 생존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이 무알콜 청정지역 몸뚱이는 절대 술을 반갑게 받아줄 생각이 없는데 어찌하오리까. 의지가 부족하다 하여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의 첫 부서 배치가 사내 제일가는 애주가 수장이 이끄는 부서였다. 일주일에 7일을 술과 함께, 취향은 확실한 소주파, 점심은 무조건 해장 국물요리, 해장 후 커피 한잔 이면 어제 술을 모두 깨고 그때부터 다시 오늘 술자리 메뉴를 고민하는 부장이 이끄는 부서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소주잔 신나게 함께 기울일 직원을 원하셨을 텐데, 얼굴만 주당인 알쓰라니.. 이거 죄송해서 어찌하나.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나는 바로 숨길 수도 없이 커밍아웃을 해야 했다. "저.. 술을 정말 전혀 아예 못합니다." 신입이 본인의 입사를 축하하는 자리, 첫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술을 못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아니 요즘애들은 말이야' 상황이다. 싸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 선배들이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따렀다. "에이~ 우리는 절대 강요 안 해,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말이야~ 그냥 기분 좋게 한두 잔만 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잔을 들이켰다. 테이블 위의 김치 색깔이 된 나는 숨쉬기가 힘들어 물을 계속 마시며 힘들어했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려 얼굴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온갖 애를 썼다. 다들 내 상태의 심각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고, 그때부터 나는 공식적으로 '술을 정말 전혀 아예 못 마시는 애'가 되었다. 

회사생활에서 회식의 중요함은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을 테다. 주량이라는 핵심역량은 애초부터 결여된 나에게 회식을 대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술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식을 다 따라다니는 '예쁜 신입'이 되든가, 술을 못 마시니 모든 회식에 빠질 이유가 분명한 '요즘 신입'이 되는 것. 그때의 나는 모든 일에 기를 쓰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나의 역할이라 믿었다. 온갖 술집 명함을 다 가지고 다니며 미리 예약을 하고, 자리 앉기도 전에 테이블 세팅을 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부지런히 챙겼다. 하지만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고 새벽까지 계속되는 술자리에 앉아있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쩌다 여직원도 나 한 명, 20대 직원도 나 한 명뿐인 부서에 발령을 받아 시커먼 양복 입은 아저씨들과 밤늦도록 야근을 하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자리를 매번 따라다니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식 또한 업무의 연장이라, 이 또한 나의 역량이라, 예쁨 받고 싶었던 그때의 나는 모든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를 썼다. 혼자 외로운 서울살이 하는 우리 막내 혹시나 저녁 굶을까 굳이 맛있는 저녁을 사준다고 하시는 마음을 거절할 수가 없기도 했다. 적게는 주 2회 많게는 주 4회까지, 크고 작은 술자리가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저녁을 먹으며 시작되는 회식도 있었지만, 힘든 야근을 끝내고 굳이 수고했다며, 업무를 하나 털어내고 격려하며, 일이 잘 끝나면 축하하고 업무 마찰이 생기면 위로하며, 직원의 생일도 꼬박꼬박 챙겨가며 술자리의 명분도 얼마나 다양했는지 모르겠다. 밤 10시가 넘도록 야근 후 사무실을 나서면, 빨리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그 순간 맥주 한잔 시원하게 할까 라고 누군가 말을 꺼내면 정말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내 생일날엔 서울에 혼자 사는데 외롭게 보내면 안 된다며 굳이 비싼 밥을 사준다며 나를 챙겨주셨다. 메뉴는 전혀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횟집에 소주였지만 말이다. "저도 서울에 생일 함께 보낼 친구 많은데요"라고 나는 절대 말하지 못했다.


아주 옛날 방식이지만, 회식하고 집에 들어갈 때엔 꼭 누군가 택시비를 챙겨주셨다. 제철 음식을 챙겨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느꼈고, 멀리 사람이 북적이는 맛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생일엔 꼭 촌스러운 커다란 케이크에 초를 불고, 참석한 부장님들이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회식 술자리 그 자체의 의미로는 나에게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날들이기도 했던 것 같다.(이것으로 이미 나도 꼰대인 것 인가..) 물론 부장님과 과장님들의 '나 때는 말이야' 그때 그 시절 영웅담은 절대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이긴 했지만, 어쨌든 모두 회사에서도 인생에서도 나보다 한참 선배인 분들이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업무는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으로서 듣고 배울 것들도 많았다. 자식들이 커가는 이야기, 부모님이 늙어가는 이야기, 타 부서 직원들과 한판 크게 뜬 이야기, 늘 바쁘게 각자의 자리서 업무 하느라 알지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힘든 하루의 끝에 술잔과 마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들이었다.

추운 겨울날 회사 근처 치킨집이나 전집에서 2차를 끝내고 들어가는 길에 과장님들과 작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오뎅과 만두를 파는 작은 트럭이 있었다. 업무도 회식도 버거웠던지라, 뜨끈한 오뎅 국물 연기와 냄새가 얼마나 맛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내가 뜬금없이 '오뎅 사주세요' '떡볶이 사주세요' 해도 기쁘게 지갑을 열어주시던 고마운 아저씨들이 나의 선배들이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과장님들과 트럭에 나란히 서서 뜨끈한 오뎅 꼬치를 후후 불어가며 입에 물면, 힘들고 길었던 오늘 하루의 업무도 사람도 회식도 모두 위로되는 것 같았다. 따뜻했다. 조금 눈물이 차올랐던 것도 같다. "고생했어, 우리 막내 고생하는 거 우리 다 안다" 하고 툭툭 등을 치는 과장님 말이 조금은 본인의 처진 어깨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고생한 하루였다.

혼자 사는데 집에 가서 더 먹고 속 든든히 자라며 굳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를 포장해 내 손에 들려주셨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노란 고무줄 끼워 까만 봉지에 담아 손에 들고 집에 가는 길, 마음이 왜 그리 따뜻했는지 모르겠다. 작은 방 침대에 기대앉아 아직도 따뜻한 만두 여섯 알을 보고 있자니 괜히 몽글몽글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라 아빠에게 문자를 했다. 아빠도 이런 날 들이, 조금은 벅차게 힘들고 조금은 사소한 것에 위로를 받은 그런 보통의 날들이 많았겠지 싶어 아빠 생각이 났다. 또 회식으로 귀가가 늦는 혼자 사는 딸 걱정에 잠을 설쳤을 아빠가 답장을 보내왔다. 그게 다 사람 사는 맛이라고, 힘든 날도 있지만 또 그렇게 별 거 아닌 거에 위로받고 위로하며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 딸 힘내라고. 가장 많이 힘들었고, 가장 많이 울었고, 가장 많이 위로받았고, 가장 많은 기억들을 남긴 보통의 날들이었다.

기억이란 것이 그러하다. 야근은 힘들었고, 회식은 고역일 뿐이라 그리 싫었던 시간들인데, 지나고 나니 얼굴이 벌겋게 술이 취한 과장님들과 편의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 먹던 기억, 길거리 노점에서 붕어빵을 호호 불며 먹던 기억만 남는다. 신입이라고 나만 힘들었겠는가, 연차가 더 쌓인 과장님이라고, 관리자 명함을 단 부장님이라고 어디 힘든 날이 없는 회사생활이었겠는가. 아등바등 애쓰는 어린 여직원 챙기느라 그분들도 더 힘든 점이 어찌 없었겠는가. 모두 다 그렇게 힘든 하루의 끝에 서로 사소한 위로를 건네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 또 하루를 보내고, 내일 하루 또 출근할 힘을 얻었던 것이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 내가 선배가 되고 보니, 후배에게 매일 그렇게 수고했다 격려하고 밥 사주며 챙겨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족한 선배가 되고 보니, 꼰대가 되지 않고 후배를 잘 가르쳐준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닮고 싶은 선배가 되리라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말이다.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선배가 있을 때, 모르면 마음껏 물어볼 수 있을 때, 잘못해도 부끄럽지 않게 혼날 수 있는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면, 내 손에 늘어가는 책임감의 무게만큼이나 마음껏 힘들어하기도 시원하게 혼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누군가에게 "오뎅 사주세요""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하고 마음껏 기댈 수 있는 선배들이 있다면, 지금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 말해주고 싶다. 그 따뜻한 순간순간들을 마음에 가득가득 기억해두라고, 그 기억들이 오래도록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오뎅'은 국어사전에서도 일본어, 비표준어이므로 '어묵'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간장으로 간을 한 국물에 어묵과 여러 식재료를 넣고 우려낸 일본 요리의 한 종류라고도 합니다. 일본어를 굳이 사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우리가 아는 그 어묵 꼬치는 왠지 '오뎅'이라 부를 때 그 느낌이 더 와 닿는 것 같아 글에 계속해서 해당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어묵 꼬치에 뜨끈한 국물을 빨간 플라스틱 컵에 호호 불어가며 먹는 그 느낌 말이지요.(요즘은 다 종이컵을 쓰지만..) 따지자면 '어묵'은 식재료의 이름이니,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음식은 어묵탕에 가장 가깝겠지만, 어묵탕은 왠지 집에서 엄마가 뚝배기에 끓여주시는 느낌이 듭니다. 비표준어의 사용으로 불편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추운 겨울날 포장마차에서 사 먹던 그 느낌을 전하고 싶어 굳이 사용한 단어이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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