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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Nov 17. 2021

따리에바

중국사람 중국음식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여기는 하얼빈 역 환구극장. 105년 전 바로 이 자리, 하얼빈 역에서 울려 퍼졌던 외마디 총성이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흐름을 뚫고 다시 한번 울려 퍼진다. 1400여 석을 메운 중국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2015년 2월,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영웅'이 의거 현장인 하얼빈역 무대에 올라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악명 높은 하얼빈의 추위 속, 뜨겁게 번져나갔을 그때의 열기를 상상해 본다.


하얼빈, 얼음 축제의 도시, 중국어 표준 발음을 들을 수 있는 곳, 남편의 교환학생 시절,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 그래서 하얼빈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낯설지 않은 도시였다. 믿거나 말거나 '하' 하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어는 걸 볼 수 있다는 남편의 교환학생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다가도, 하얼빈 역 바닥에 표시되어 있다는 저격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서 봤던 뮤지컬 '영웅'을 떠올리며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물론, 빙등 축제 사진을 보며 주말 가족 여행을 꿈꾸기도 했고.


그래서였을까, 여전히 가끔은 당혹스럽고 낯설기도 한 중국에서, 이곳 하얼빈만큼은 어쩐지 아주 낯설지가 않았다. 따리에바를 알기 전까지는.



남편이 하얼빈 출장을 다녀온 날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남편이 까만 봉지에 싸인 커다랗고 묵직한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어댔다. 쿵 소리가 났다.  아니 이번엔 도대체 또 뭘 가져온거지? 남편이 중국 도시들에 출장을 다니며 간혹 현지 직원들이 주는 선물을 받아오는데 가끔은 상자를 열어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아이 키만 한 이름 모를 물고기, 살아있는 꽃게, 해삼 등 생물들도 모두 종이 박스 하나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상자 속에 담긴 물고기는 평생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살아있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까만 봉지를 들어 올려보니 딱딱한 게 제법 묵직했다. "뭐야 이거?"

"빵."

"빵???" 


빵이라면 나도 좀 아는데, 깜빠뉴도 알고 치아바타도 알고, 가장 좋아하는 빵은 겉이 딱딱하고 속은 촉촉한... 아, 올리브나 호두가 들어있으면 더욱 좋고..!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처음 보는 비주얼이었다. 손으로 겉을 눌러봤을 때의 경도는 어림짐작 '활석'. 빵이란 말에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가 이 실망하며 묻는다.

"이거 어떻게 먹어?" 내 말이, "이거 어떻게 먹어?" 남편에게 되물었다.

"이게, 하얼빈 특산품인데, 원래는 러시아 빵 이래. 잘라서 식빵처럼 잼 발라 먹으면 된대." 남편은 들은 대로 정직하게 빵에 대한 기원과 맛, 먹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빵을 잘라서 토스트기에 구운 다음 잼을 발라서 먹어보니, 맛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단, 발효 맛이 강한 편이라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의 조화는 언제나 환영이기에 나는 맛있게 먹었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이 익숙한 아이들은 한 입 먹고 땡이었다. 문제는 양이었다. 매일 조금씩 먹어도 도저히 다 먹지 못할 크기였기에, 무조건 나눠 먹어야 하는 빵이었던 것이다.


입 안에서 꼭꼭 씹히는 거친 밀의 입자가 고소하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 문득 궁금해졌다. 하얼빈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러시아 빵이라니. 빵 외에도 하얼빈은 홍창(소시지)으로도 유명하고, 러시아 초콜릿으로도 유명하다. 몇 년 전 국경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하얼빈 여행을 갔을 때 보았던 마트로시카 인형들도. 그러고 보니 모두 러시아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언제부터였을까? 하얼빈에서 러시아식 빵 따리에바를 먹기 시작했던 때는...



하얼빈, 중국 동북 3성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의 성도. 원래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러시아가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게 되면서 하얼빈의 도시화가 시작됐다.

동청철도는 만주리-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를 이었던 시베리아 철도의 일부이며, 지선은 하얼빈에서 뤼순, 다롄으로 연결된다. 러시아는 1896년에 확보한 동청철도 부설권을 활용, 1898년에 하얼빈역에서 뤼순에 이르는 남만주 지선의 부설권까지 차지한다. 이에 러시아는 동청철도 보호를 구실로 16만 명을 출병하여 만주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미국과 영국이 반발, 특히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일본에게 동맹을 제안한다. 1935년 동청철도가 일본에게 팔린 후 러시아인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으로 되돌아가고 하얼빈은 일본의 관할권이 된다. 1946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하얼빈의 통치권이 넘어간 후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988년까지 하얼빈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은 30여 명뿐이었다고 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 오늘경제 김세곤의 역사칼럼 21.9.24 )


그러니까, 하얼빈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격동기와 함께 시작되었던 셈이다. 하얼빈 기차역 간판에 한자와 나란히 적힌 해독 불가 러시아어,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찻길이 아득했을 감정을 상상해 본다. 쏟아지는 금발의 러시아인들로 동양의 파리가 되었다가, 일본의 집단 이민 정책으로 731부대의 상흔만이 남아버린 작은 어촌 마을.  우리네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어지러웠던 역사의 한 복판에서도 이 땅을 터전으로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볼 뿐이다.


몇 년 전 가을, 하얼빈에 놀러 갔을 때 봤던 성 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웠다. 동양권 건물과 구분된다는 이유만으로 얼핏 봐선 유럽 등지에서 봤던 익숙한 성당 양식을 떠올리게 되지만,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개성을 발견하게 된다. 고유의 돔 양식과 푸른 색채가 자아냈던 신비함이 지금도 잘 잊히지 않는다. 금융의 중심이었다던 중앙대가에는 아스팔트 대신 거친 돌이 깔려 있는 널찍한 길을 중심으로 각종 상점들과 간식거리들이 즐비해 있었다. 지금은 아름답고 이색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지만, 과거에는 침략이자 위협, 낯설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해본다.  현재 남겨진 것들을 통해 역사 속 과거를 기억하듯,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그들이 잊지 않으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성 소피아 성당, 중앙대가, 홍창, 마트로시카, 맥주, 초콜릿, 그리고 따리에바. 역사 속 시간이 남긴 것들이다. 그중 따리에바(大列巴)는 러시아어로 빵을 뜻하는 리바를 중국어로 옮긴 것에 '大'를 붙인 이름으로, 그 당시 하얼빈 사람들은 자국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 제빵사들의 어깨너머로 빵 만드는 걸 보고 배워 무게 2킬로 되는 커다란 빵, 따리에바를 구워 즐겨 먹었다고 한다. 들어가는 재료는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뿐이다. 한 번 구워서 며칠 두고 여럿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귀한 식량이었을 것이고, 밀가루 음식(面食)을 즐겨 먹는 중국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았을 것이다. 격동의 시절, 하얼빈 사람들은 커다란 보름달 같은 따리에바를 보며 잃어버린 땅에 대한 헛헛한 마음을 채웠던 건 아닐까, 서로 다른 이웃에게 빵 한 조각 나눠줄 수 있는 마음 하나는 잊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중국에서 한국인으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권 갱신 만큼이나 끝없는 갱신이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 나에게 맞춰지기보다 내가 맞춰야 하는 게 많아진다. 새로운 것은 대부분 받아들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당황스러워지는 감정 또한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언어의 배움에 끝이 없듯, 한 나라를 알아간다는 것 또한 참으로 끝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도 인지상정이란 것이 있고, 사람 사는 향기가 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거구의 남자 직원이 남편에게 중학생 딸과 서먹해진 관계를 털어놓으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입학 날 오전 내내 학교 담장을 기웃거리는 같은 반 엄마들을 본다. 철저한 가족주의, 개인주의 같은데 그래도 외국인인 나에게 먼저 손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키 큰 물고기처럼 가끔은 극구 사양하고 싶은 선물도 있지만,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새로운 것들을 커다란 선물이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왔던 둥글고 커다란 따리에바처럼.





대문 이미지 :성 소피아 성당 /百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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