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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즈 Feb 28. 2023

에세이02, 짝사랑

가슴 시린 초겨울의 냄새

초 겨울의 냄새가 있다. 문이 열리면서 코 끝 찡하게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면 나는 저절로 가슴이 설렌다. 그 바람을 맞으면 어깨가 아니라 심장이 한번 으쓱하는 느낌이다. 차갑고 얇은 유리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랄까. 그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면 나는 대학교 1학년 그 시절 그 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휴학했다가 2학기에 복학한 선배는 아웃사이더였다. 요즘 말로 아싸라고 하지. 선배님들 명단에 이름은 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 늘 초저녁 정해진 시간에 통학 기차를 타고 집에 가야 한다라고만 들었다. 어느 날 학교 공용 PC실에서 문득 내 눈에 띈 선배는 병든 시인같이 하얀 피부에 얇은 홑꺼풀, 늘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180 정도의 키에 다른 복학생 선배들과 다르게 캐주얼 재킷을 입은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매일 술에 절어 시답잖은 농담을 날리는 선배들과 달랐다. 유치하고 아직 젖내 나는 동생 같은 동기 남자애들과도 달랐다. 말을 절대 먼저 거는 일이 없었고,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집이 멀었던 선배는 야속하게도 MT에도, 과모임에도, 전강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하도 오래돼서 내가 처음에 왜 그 선배에게 반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냥 다른 선배들과 다른 그런 부분들에 대한 신비주의, 호기심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집 방향도 다르고, 얼굴 보고 말할 기회도 없었던 그 선배와 처음으로 말한 건 텔넷 채팅 덕분이었다. 천리안, 하이텔이 유행하던 그 시절, 우리 학교는 학우들끼리 메일과 채팅이 가능한 자체 서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귓 동냥으로 선배의 아이디를 알아두었다가, 모르는 척 무심한 척 먼저 말을 걸었던 건 나였다. 차마 얼굴을 보고 말을 걸 자신은 없었기에.


write exx 안녕하세요.

write txx 안녕하세요.

write exx 선배 저 XX학부 후배 XX에요.


대화를 어떻게 이어갔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상관있는 척 이어다 붙이거나 쓸모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이어 갔을 거다. 선배는 유치하고 시시콜콜한 내 얘기를 다 받아주고 대꾸해 주며 자기 얘기도 많이 했다. 오프라인에서 보다는 생각보다 다정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낯 가리는 성격이었을까?


그렇게 채팅을 시작하여 정말 그 당시 집 전화 요금이 10만 원이 넘게 나오도록 밤마다 채팅을 했다. 채팅하다가 밤을 꼴딱 새우고 다음 날 학교도 못 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일상 이야기부터 가족, 친구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서로의 미래까지. 이건 뭐 스킨십만 없었지 여느 커플과 다름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오프라인에서는 모르는 사람처럼 데면 데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저렇게 남들에게 늘 시크한 선배가 밤만 되면 나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밤을 같이 새우는 사이니까. 꼭 연인이 아니어도, 난 그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 같고 제일 친한 사람 같아서 그것 만으로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요즘 말로 소울 메이트.  연인은 끝이 있지만 소울 메이트는 끝이 없으니까,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반복된 하루 사는 일에 지칠 때면 내게 말해요

항상 그대의 지쳐있는 마음에 조그만 위로 돼 줄게요 

요즘 유행하는 영화 보고플 땐 내게 말해요

내겐 그대의 작은 부탁조차도 조그만 행복이죠


둘이 함께 좋아하던 노래이자 당시 유행했던 토이의 그럴 때마다 가사가 곧 내 마음이었다. 학교 가는 게 매일매일 즐거웠고, 우연히 학교에서 선배를 마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쿵쾅 거려 들킬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주로 공대 쪽에 출몰하던 선배였다. 선배가 자주 가는 조교실과 공용 PC실을 기웃 거리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기대했다. 선배는 늘 기차를 타고 집에 갔는데, 기차역 가는 방향에 버스를 기다렸다가 우연히 만난 척 동행해 배웅을 한 적도 있다.


한 번은 선배의 초대로 선배 동네에 있는 비행장에 간 적이 있다.  첫 데이트였다.

비행장이 얼마나 쭉 뻗어 있는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렸다. 이런 멋진 곳이 있다니.

늦은 오후 무렵이었는데, 비행장 지평선에서 우리 쪽으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내 얼굴처럼 발그레했다. 길어진 그림자 둘과 우리 둘만 그 비행장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오렌지 빛 필터를 씌운 듯 한 늦가을 그때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휙 불었는데 갑자기 선배가 말했다.


 “팔짱 껴도 돼?”

 “예???!!!”


너무나 놀란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마음 한편에선 쾌재를 불렀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어떡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쭈뼛쭈뼛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무안해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장난을 칠 생각이었는지 선배는 갑자기 자기 두 팔을 자기 가슴 앞으로 올려  팔짱을 끼더니


“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라고 놀리듯이 말했다.

그냥 그때 선배 팔짱을 내가 먼저 와락 꼈다면 우리는 사귀게 되었을까?


제대로 된 고백도 못해보고,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던 겨울 어느 날 같은 과 친구 중에 한 명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상대는 바로 그 선배였다. 그 선배는 낮에는 그 친구와, 밤에는 나와 연인처럼 행동했다.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 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와 그 친구 말고 또 다른 친구까지 엮여서 3명의 여자가 그 선배를 자기와 유사 연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셋 다 같은 과 친구였지만 선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공유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가 얼마나 친한지 알 수 없었다.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에 식음을 전폐하고 한 동안 앓았다. 당연히 선배랑은 연락을 딱 끊었다. 내 친한 친구들은 그를 카사노바 새끼라고 욕했지만, 난 그것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 너무 좋아했기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나눈 대화들은 연인의 것이 아니기에 친구들에게 특별하게 이야기해 줄수도 없었다. 선배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어차피 내 남자친구는 아니었으니까. 짝사랑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선배가 내가 일하는 아르바이트 장소로 찾아와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뭔가 슬픈 얼굴이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러 온 것 같았는데, 나는 만나지 않았다. 만나서 할 말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게 그냥 그 사람에게 하는 최대의 복수 같았다. 선배랑 사귀었던 친구는 얼마 못 가 선배랑 헤어졌다고 했다. 너무나 착했지만 눈치가 다소 없던 그 친구는 내 속도 모르고 술을 마시고 울고 불고 주정을 부렸다. 헤어졌다고 우는 그 친구가 참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선배의 마지막을 못 봐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끝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안도감이 있었다. 부서질까 봐 차마 가지지 못했던 순진했던 나, 들킬까 봐 꺼내놓지 못했던 내 마음. 내 마음 제대로 표현도 못해본 바보 같았던 나. 내가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라 꼭 연인이 아니었더라도 친한 선후배로 계속 지낼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선배와 다른 관계로 지낼 수 없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남자 주인공 츠네오가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라는 대목이 곧 내 마음이었다. 


살아 보니, 그 사람 보다 그때의 내 마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공기마저 설레던 그 순간들. 내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렸던 신기한 경험.  1년에 딱 한번 마음이 아닌 오감이 느낄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초 겨울 그 찬 바람 냄새를 맡았을 때이다.


ps. 그러나 다음 생에는 무조건 고백이다. 일단 마음에 들면 오늘부터 1일 하고, 사귈 거다. 사귀어 보고 아니면 말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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