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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즈 Feb 28. 2023

에세이01, 서당골 삼남매

엄마와 함께 35년전 유년 시절 산책

내 나이가 먹는 속도가 너무나 쏜 살 같아서 우리 엄마의 남은 시간도 점점 더 초조해진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볼 때마다 늘 씩씩하게 혼자 사시는 엄마가 너무 감사하다. 그렇지만 건강하게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뵈러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왕복 6시간 달려 엄마를 만나고 왔다. 만 24시간이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뵙고 오니 또 마음이 놓인다.

낮에 엄마와 근교 나들이를 가려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의욕과는 다르게 컨디션이 급격히 안좋아졌다. 나들이는 포기하고 엄마와 초밥에 메밀국수를 먹기로 했다. 초밥을 맛있게 먹다가 문득 “엄마 우리 어릴 때 살던 서당골 그 동네에 한번 가보고 싶다. 지금 어떤지 한 번 가볼까?” 하고 엄마 손 꼭 잡고 식당을 나섰다.


거의 35년만에 찾은 곳은 옛날에 서당이 있던 동네라 서당골이라 불리던 곳으로 나 초등학교 3~4학년때 2년 정도 살던 동네이다. 엄마는 이 동네 근처를 지나칠 때 마다 말씀하시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멀리 시장에 다녀 오다 장대 같은 소나기를 만나서 남의 집 처마 밑에 비를 피했던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는 엄마가 나에게 시장 갔다 오는 길에 껌을 사주었는데 내가 껌 종이를 길에 버리지 않고 집에 올때까지 주머니에 꼭 넣어서 와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너무 착해서 뿌듯했다는 얘기를 아직도 몇 번이나 하신다. 그 얘기를 자꾸 들어서일까? 어른이 되서도 나는 길에 쓰레기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서당골에서 살았던 그 집은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세 들어 살던 집이었는데 바로 산 아래에 위치하고 마당에 텃밭이 굉장히 넓은 집이었다.시내에서 좀 떨어진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그때 만해도 자전거로 출퇴근 하시던 아빠와 멀리 까지 장을 보러 다녀야 하는 엄마는 힘드셨겠지만 나에겐 유년 시절 기억에 클라이막스 같은 무대였다. 얼마전 심윤경 작가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을 때도 이 동네 집과 골목들에 대입해서 상상하며 읽었었다. 소설과 다르게 나에게 그 동네와 집은 나쁜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기억만이 가득하다는 점은 좀 다르다.


우리 집은 오래된 한옥이었다. 흙마당이 워낙 넓고 지대가 높아 안동 시내가 다 내려다 보여서 마루에 앉아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난 그 마루에 앉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릴 때 바람이 살랑 살랑 불었었는데 그 촉감과 바람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바람이 머리칼과 얼굴을 살살 간지럽히면 어찌나 시원한지 누워서 얼굴을 바닥에 맞대면 오래된 고목 냄새가 풍기는 처마 밑 대청 마루에서 나도 모르게 낮잠에 들곤 했다.


비 오는 날엔 마루에 앉아서 흙 마당이 푹푹 패이며 고였다가 넘치기도 하는 빗물 줄기 들을 구경 하는게 낙이었고 어린 나이에도 젖은 흙냄새가 너무 좋았다. 흙 마당이라 언제든지 신발 모서리로 줄을 자유 자재로 그어서 동생들과 요즘 말하는 오징어 게임도 하고 땅 따먹기도 하고 어디 멀리 가서 놀 필요도 없었다.

하루는 마루에 앉아 색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색칠 공부 속 만화 여자 주인공의 머리를 녹색과 흰색을 섞은 물감으로 민트 색을 만들어 칠한 적이 있는데 아이템플 학습지 선생님이 오셔서 보시고는 머리를 민트색으로 칠했다고 굉장히 색다르게 색깔을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잠깐 내가 천재인가 하고 화가의 꿈을 꾼 적도 있다.


동네에 또래 아이들과 동생들이 너무 많아서 무리 지어 많이도 놀러 다녔었다. 뒷산이며 골목에 우리 아지트를 만들어서 나뭇가지를 모아 요새를 만들고 숨어서 놀기도 했다. 집에서 각자 보물들을 가져와 숨겨두기도 했다. 애국심이 투철했었나? 왠지 우리는 그 요새의 이름을 무궁화 라고 지었었다.


한번은 그 무리 중 한명이었던 동생 중에 섭이라고 바지런하고 별난 녀석이 있었는데 그 당시 7살 짜리가 도토리를 주워서 팔겠다고 나가서는 밤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아온 동네 사람들이 찾으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밤에 멀쩡하게 돌아온 섭이를 보고 어른들이 어딜 갖다 놔도 될 놈이라고 난 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삼성전자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난 놈이다.


부지런한 울 엄마는 그 집에서 텃밭도 가꾸고 넓은 마당 한켠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먹 자두를 푹 고아 달여 자두 주스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이젠 세상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천연 주스였다. 아빠의 적은 월급으로 빠듯하게 삼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울 엄마는 사먹는 과자 대신 집에서 직접 만든 간식을 많이 만들어 주셨었다. 호떡, 핫도그, 구멍 뚫린 도너츠, 카스테라, 술빵, 밀가루만 넣어서 설탕 찍어 먹는 부침개, 우리가 편식하는 각종 재료를 다져 넣은 편식 예방용 만두, 식빵가루 묻힌 인절미, 카스텔라, 그리고 각종 수제 과일 주스들.. 마당 한쪽엔 강아지는 기본이고 닭도 키우고 토끼도 키워서 동네 친구들이 와서 토끼 풀도 주고 그랬다. 가끔 걔들이 우리 집 저녁 메뉴가 되기도 했다는 슬픈 사연도 있지만 말이다.


산 아래 집이라 산에 살던 다람쥐나 청설모들이 집에까지 들어와서 놀다 가고 마당이랑 지붕엔 늘 도토리들이 가득 했다. 동네 길 고양이들이 죄다 지붕 밑에 숨어 살았는지 발정기 때가 되면 얼마나 무서웠던지! 아기 울음소리로 울어 대는지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낮에 죽어라 싸우며 원수 같던 동생이 잠들었는지 확인해보고 자고 있으면 꼭 껴안고 잠들기도 했다. 낮에 죽도록 싸웠으니 자존심에 무서워서 껴안고 자는 걸 들키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어릴 땐 고양이가 너무 너무 무서웠다. 지금은 세상 둘도 없는 애묘인이 되었지만..


집 근처에 중고등학교들이 많아서 시골에서 시내로 유학 온 고등학생 자취생 언니 오빠들도 이 집에 세 들어 같이 살았었는데 언니 오빠들이 우리 삼남매를 너무 이뻐 하고 귀여워해 주었었다. 특히 누나 둘 밑에서 애교 만점이었던 막내 남동생은 그 당시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는데  온 가족과 언니 오빠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실제로 귀엽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재식이 오빠가 있었는데 착한 꽃 미남이었다. 오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기도 했었는데 그 중에 규석이라는 오빠가 너무 잘생겨서 설레기도 하고 어린 맘에 자주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역시 나는 어릴때부터 꽃미남을 좋아했나보다. 훗날 가수 기차와 소나무를 부른 이규석을 보고 이름이 규석이면 다 잘생겼나? 하고 생각했었다.


막내는 가끔 재식이 오빠 자취방에서 아무 때나 낮잠을 자고 오기도 하고 공부하는 오빠들 방에 맘대로 침입해서 자기 집 인냥 놀고 오고 그랬다. 나도 가끔은 앉은 뱅이 책상에서 공부하는 오빠들 옆에서 그림인지 낙서인지를 그리는 동생을 데리러 왔다는 핑계로 한참 같이 놀다 오고 하기도 했다. 장난감이 부족했던 우리들에게 고등학생 오빠의 적은 살림살이들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때 맞춰 울리는 알람시계도 있었고, 큐브도 있고 색깔별로 볼펜도 있고 마냥 다 새로웠다. 오빠는 라면을 끓여서 접시 대신 라면 뚜껑에 먹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오빠들은 우리를 내쫓기는 커녕 먼저 울 엄마아빠의 허락을 받고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놀아 주기도 했다. 요즘 같이 흉흉한 시대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모두 순수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언니 오빠들도 고작 16~18살 사춘기 청소년들이었을 텐데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외로웠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생각해보면 한 지붕 아래 다른 세대들이 모두 다 한 가족 처럼 지냈고 우리 엄마아빠도 그 언니오빠들을 친 조카들 처럼 대해주셨었다. 엄마는 가끔 오빠들 방을 청소해주기도 하고 알람 시계를 맞춰놓고도 일어나지 못하는 부모와 떨어져 사는 어린 오빠들을 깨워주기도 하고 가끔 고향과 연락할 수 있게끔 전화도 빌려주며 정말 친가족처럼 지냈다. 잔치 국수도 삶아서 같이 먹고 부침개도 같이 먹고 그랬다. 오빠들 부모님이 시골서 먹을거리들을 보내시면 우리집 것도 챙겨 주시곤 했다. 언니 오빠들은 자기들도 용돈 받아서 객지에서 자취하던 애기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삼남매가 귀엽다고 과자도 사주고 사탕도 사주었다.


냄새, 온도까지 생각 나는 나의 생생한 기억과는 다르게 오랜만에 찾아갔던 그 동네에 그 집은 이제는 담벼락과 골목길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원래 우리집 있던 곳은 괴상한 주차장 건물이 들어서서 폐가처럼 되어 흉물스러웠다. 집은 다 사라졌지만 집과 골목의 경계를 나눠주던 담벼락과 좁은 골목길은 그대로 있었다. 세월에 더욱 거칠어지고 타버린 것 같은 시커먼 이끼의 흔적들로 어두워진 담벼락과 골목의 콘크리트를 보니 마음이 꺼칠해져 왔다. 가끔 언니 오빠들이 그 담장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무서워서 끝내 올라가지 못했던 그 담벼락이 지금 보니 이렇게나 낮은 담벼락이었구나 싶었다. 골목에 차가 없어서 정말 걱정 없이 마음껏 놀았었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골목 구비 구비 들 마루에 모여 앉아 계셔서 놀이터는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동네 어른들의 보호 아래 더 안전하게 놀았던 것 같다. 진짜 해질 때 엄마가 밥 먹어라 할 때 까지 놀았었다.


살던 집을 돌아 나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골목 모퉁이 옛날 단골 점빵도 찾았다. 내가 어릴 때도 그렇게 좋은 집은 아닌 매우 작은 집이었는데 이제 대략 한 60~70년은 된 건물 같다. 점빵 앞 매대에 알 사탕도 팔고 하드도 팔고 구슬과 동그란 딱지도 팔고 동전 초콜렛, 비타민을 가장한 청량 과자, 하얀 돌 사탕 등 불량 식품도 잔뜩 팔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쇼핑 아이템은 종이 인형이었다. 가끔은 달력 뒷면에 종이 인형을 그려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도 하고 팔거나 딱지랑 바꾸기도 했다. 엄마가 심부름 보내셔서 외상으로 콩나물이나 두부를 급하게 사오기도 했다.


지금은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없는 걸 보니 곧 이 동네의 남은 집들도 다 허물어지고 재개발이 되려나 싶었다. 아니면 지방의 몰락 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흉흉한 폐가처럼 방치가 될까. 너무 궁금했지만 막상 보고 나니 늙어서 힘없는 부모를 보는 심정처럼 아련하고 서운하고 가슴 아린 산책이었다. 30년도 넘은 어릴 적 기억이 이리도 생생한데 언제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을까. 그 때 우리 엄마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젊었었는데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뻐근 했다.


골목길을 내려오며 엄마에게 “나는 이 동네에 살았던 시절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애. 엄마가 고아준 먹자두 주스 또 먹고 싶다. 그거 진짜 찐하고 맛있었는데” 고 했더니 엄마는 “먹자두 주스를 내가 해줬다고? 난 전혀 기억이 안나는데.. 돈이 없어서 맛있는 것도 못사주고 남들 배달 해서 먹는 요쿠르트도 하나 제대로 못 사주던 시절이었는데 그 때가 뭐가 그리 좋았다 하노” 하시며 내 손을 꽉 쥐어 주셨다.


고만고만했던 사촌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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