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안 읽는 게 아니라... 책 구매 아티스트일 뿐이에요
“혹시 ‘칵테일, 러브, 좀비’ 판매되었나요?”
직장인이 가장 고통을 느끼는 오후 3시, 나른한 햇살에 몸을 맡기며 어서 6시가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때였다. 애플 워치에 징징 알람이 울려 손목을 들어 보니, 당근 마켓에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틀 전에 이미 거래한 책을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역시 ‘칵러좀’(소설 <칵테일, 러브, 좀비>를 주로 이렇게 줄여 부른다)은 인기가 많군, 생각하면서 습관적인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안녕하세요, ‘칵테일, 러브, 좀비’는 판매됐습니다.”
짤막한 답장을 보내고 다시 동태 같은 눈빛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또 손목이 징징 울렸다. ‘네 수고하세요’ 같은 통상적인 답변이겠거니 싶어 대충 흘겨봤다가 꽤나 긴 스크롤에 손목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앗 그렇군요..ㅜㅜ 제가 책을 잘 안 읽어서 책에 재미를 붙이고 싶은데, 혹시 칵테일 러브 좀비보다 더 흥미로운 책도 판매하시나요? 상점을 보니 책을 꽤 판매하시는 것 같아서요!”
음 그러니까, 지금 책을 추천해 달라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과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말풍선을 몇 번씩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보통 당근에서 구매하고자 하는 물건이 없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돌아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책에 재미를 붙이고 싶으니 혹시 다른 책도 판매한다면 추천해 달라는 거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니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각종 기상천외한 빌런이 만연한 당근 나라에서 이런 귀여운 당근님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두 번째로, 어디 보여주기도 창피할 정도로 온갖 잡다한 것을 내놓은 나의 판매 목록을 ‘상점’이라고 예쁘게 표현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책 추천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흔히 덕후들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먼저 질문을 해오면, 참을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급발진을 해버린다. 나에게 있어 그런 분야 중의 하나는 책이다.)
그런 감정들이 하나로 합쳐지자, 이내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당근님에게 독서의 재미를 알게 해주고 싶다는 이상한 의무감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오후 3시의 나른함은 온데간데 없고,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느덧 이모티콘 하나 없는 사무적인 말투는 제쳐두고, ‘ㅎㅎ’ ‘:)‘ 따위를 써가면서 취향을 알려주면 가진 책 중에 찾아보겠다고, 당근에 올려둔 것 중엔 <아무튼> 시리즈가 가볍게 읽기 좋다고 성심성의껏 답장했다.
그러자 특유의 발랄한 답장이 도착했다.
“그러면 000와 아무튼 시리즈를 함께 구매해볼까용?ㅎㅎ 아니면 추천해주실만한 소설책 있으세요?ㅎㅎ“
여기서 ‘000’은 내가 당근에 올려둔 또 다른 소설책이었다. 서점에 가면 매대가 아닌 벽장에 1권정도 꽂혀 있는, 아는 사람만 아는 책이었다. 또 구매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아 냉큼 추천해 팔아버릴까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심자에게 어울릴 만한 책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방 안에 있는 책장 구조를 떠올리며 팔 만한 책을 뒤적였다. 어쩌다 보니 누군가를 독서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팔 생각도 없던 책을 내놓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되어있었다.
돈에 양심은 팔지 말자는 마음의 소리를 다시 한번 새겨들으며,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볼 수 있는 몇 권의 책을 제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간단한 책 소개까지 해주고 싶었지만 ‘투머치’인 것 같아 길어지는 말을 계속 눌러 삼켰다.
마침내 추천한 책 중 <불편한 편의점>을 구매하겠다는 답장으로 거래가 성사됐다. 언젠가 <불편한 편의점2>를 구매하게 되면, 다시 정주행하려고 보관해 두었던 책이었다. 약간은 아쉽기도 했지만, 이 책으로 누군가 독서의 재미를 알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역 앞에서 만난 당근님은 앳된 얼굴의 학생처럼 보였다. 당근님의 휴대폰에 계좌번호를 입력하면서 언젠가는 나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길 바랐다.
이북 리더기로 가볍고 편리하게 독서가 가능한 이 세상에서 반들거리는 새 책과 종이 넘기는 질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인간의 서재는 이런 식으로 물갈이가 된다. 교보문고에서 새 책을 몇 권 사 오는 날에는 갖고 있는 책 중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당근에 내놓는다. 완독한 책을 품에 끼고 살고 싶지만 나의 서재는 그리 크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근에서는 주로 책 거래를 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꼭 작은 서점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다른 물건을 팔 때보다도 신중하고, 쓸데없이 다정해진다. 당근님들이 구매한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언제 한 번은 판매 글을 올린 책이 재미있냐는 어떤 분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나랑은 안 맞았다’며 구구절절 이유를 대고는 구매를 적극 권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이었는지 당근님도 ‘ㅎㅎㅎ’하고 웃으시며, 다른 책을 구매해갔다.
대부분의 책을 반값 미만으로 내놓고 있기에, 몇 번의 거래가 성사되어도 용돈벌이는커녕 커피 한 잔 값이 나올까 말까 한다. 그럼에도 이 수고로운 일을 왜 계속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책과 관련해 짤막하게 나누는 그 잠깐의 대화들이 즐거워서였던 것 같다.
사실은 별것도 아닌 ‘썰’을 이리도 거창하게 늘어놓으니, 1년에 책을 100권씩 읽는 다독가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책을 사는 행위도 독서의 일환이라고 합리화하며 다 읽지도 않은 책들을 방 안에 쌓아두고 새 책을 사재끼는 허영심 가득한 ‘서적 구매 아티스트’에 가깝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독서보다 독서와 관련된 일련의 행위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날이 좋은 토요일에는 습관처럼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신작 표지와 책을 읽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의 독서 후기를 읽으며 대리만족하고, 지인들이 SNS에 읽었던 책의 글귀를 올리면 ‘그 책 정말 재밌지’라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중 제일 재밌는 건, 역시나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상대방에게 어울리는 책을 추천해주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제반 행위를 하다 보면, 책에 대한 지식 또한 꽤나 쌓인다.
요즘 뭐만 하면 챗GPT 이야기다. 어떤 내용으로든 대화가 가능하고, 무엇이든 물어보면 척척 알려준다는데, 그 똑똑한 두뇌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학습되는 거라고 한다. 물론 때로는 ‘세종대왕 맥북던짐 사건’처럼 말도 안 되는 오류도 당당하게 말한다고는 한다. 그런 점은 나랑도 꽤 비슷한 것 같다.
챗GPT가 인간의 역할을 위협하는 세상에서, 언젠가는 ‘책GPT’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허황된 망상을 해본다. 논문도, 기사도, 하물며 소설과 시마저도 모두 기계가 대신 만들어주는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진짜’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인문학적 감성을 피워 나가는 작은 공간의 주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굿나잇 책방’ 책방 지기 은섭이처럼.
그곳에서 나는 책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대답해주고,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상대방에게 필요해 보이는 책을 판매하거나 나눠주기도 한다. 열정에 비해 아는 건 많지 않아 세종대왕 맥북던짐 사건보다 더 한 실수들도 종종 생기지만, 나와 거래했던 50도에 육박하는 가슴 따뜻한 당근님들은 호호 웃으며 넘어가 준다. 그렇게 ‘책GPT’의 밤은 깊어 간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6시가 가까워져 온다. 나의 당근 서점에 올려둔 책들은 여전히 하트 몇 개만 눌린 채 감감무소식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 게시물을 한 번 더 끌어 올리기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방을 챙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