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나도 작가다> 라디오 녹음 후기
대학 방송국에서 일할 때 아나운서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글이 너무 숨차다'는 것. 당시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알겠는데, 무슨 맥락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나운서이자 같은 학과 동기인 친구의 투정에 멋쩍게 웃으며 알겠다고는 했지만 돌아오는 주에도 내 글은 여전히 뚱뚱했다. 아나운서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갓 인쇄된 따끈따끈한 대본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새내기 때부터 2학년 말까지, 2년 동안 활동한 대학 방송국에서 나의 직책은 PD였다. 여러 잡무가 있었지만 주로 캠퍼스에 내보낼 라디오 방송 대본을 쓰고, 부스실에 들어가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송출하는 일을 했다. 그중 가장 공을 들인 건 대본을 쓰는 일이었다. 1학년 때는 학업도 내팽개치고 대본에만 매달려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내 글을 보거나 듣는다고 생각하면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가 없다.
문제는 그 열정이 너무 '투머치'해져서 대본의 양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브런치에서 쓰는 것과 같이 자유분방한 글은 양이 많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쓰는 사람은 쓰고 싶을 때까지 양껏 쓰면 되고, 보는 사람은 눈으로 쓱 읽다가 재미 없으면 '뒤로가기'를 누르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글의 형식이 방송 대본이라는 점이다. 쓰는 사람 따로 있고, 읽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걸 당시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실제 라디오 방송 대본은 어떤 식인지 모르지만, 당시 내가 선배들로부터 건네받았던 학내 방송 대본 작성법에는 '퍼즈'(일시 정지)의 기능이 적혀 있었다. 대본을 쓰다가 적당한 부분에서 퍼즈를 넣어줘야 아나운서의 호흡이 달라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방송에 들어가면 PD는 대본을 눈으로 따라 읽다가 퍼즈 부분에서 회색 동그라미 버튼을 누른다. 이때 아나운서는 잠깐이나마 숨을 고른다.
직접 쓴 글을 소리 내 읽어본 적이 없는 나는 방송 초반 기계적으로 퍼즈를 적어 넣었다. 한 문단이 끝나면 으레 줄 바꿈을 하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나름 적당한 부분에 규칙적으로 배치했다고 생각했는데,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아나운서는 숨이 가빠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제야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양질의 정보를 전하겠다는 욕심에 앞서 읽는 사람의 호흡과 템포를 배려하지 못했다.
통유리 바깥에서 큐 사인을 주시는 PD님의 손짓을 보는 순간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학생회관 6층 부스실에서 큐 사인을 하던 내 모습부터 아나운서가 대본을 보며 헉헉대는 장면까지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내가 통유리 바깥에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 나는 목에 헤드폰을 걸고 마이크 앞에 앉아있는 것인가. 5년 전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라디오 녹음이라니. 내 목소리가 라디오에 나온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녹음이 시작되기 몇 초 전까지도 멍한 상태로 앉아있다가,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PD님의 목소리에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지만 은근히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설레기도 했던 이 경험은 지난 4월 브런치와 EBS가 함께한 <나도 작가다> 1차 공모전에 당선된 결과다. 경쟁작이 워낙 많은 것 같아 글을 올린 뒤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혼자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어느 날 기분 좋은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아직도 잘 자라주고 있는 우리 토마토와 호박이 외 여럿 채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나도 작가다> 공모전이 다른 글 공모전보다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직접 쓴 글을 내 목소리로 읽고, 또 그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또 얼마나 있을까. 전날까지만 해도 녹음을 하러 간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는데, 주엽역에서부터 20분을 걸어 EBS 사옥을 마주했을 때도, 방문자 티를 팍팍 내며 고층 엘리베이터를 저층 엘리베이터로 착각해 엉뚱한 층에 도착했을 때도 덥다는 생각뿐이었는데. PD님의 큐 사인을 받는 순간 '이건 찐(?)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긴장과 땀이 동시에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행복이 꽃피는 베란다."
제목을 입에 올린 순간 사무치게 어색한 목소리가 두 귀를 관통했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무한도전'에서 광희가 했던 더빙 수준이었다. 이 거지 같은 섬에 버려지다니... 중반부부터는 목소리가 잠겨 쇳소리도 나왔다. 담배도 안 피우는데 어떻게 이런 걸걸한 목소리가 성대에서 나올 수 있지. 발음은 또 왜 이렇게 꼬이는 건데. 첫 연습 녹음은 말 그대로 '멘붕' 그 자체였다.
녹음을 마치고 PD님은 원래 다들 첫 번째보다 두 번째에 더 잘한다며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셨지만 나는 형편없는 낭독 실력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보다도 더욱 생경했던 건 내가 쓴 글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볼 때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느낌이었는데 소리 내 읽는 건 또 달랐다. 발음이 쉽지 않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하는 말도 있었고, 문장이 길어 호흡이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문장의 시작과 끝에서 보이지 않는 퍼즈를 만들고 호흡을 정리하며, 방송국에서 기계적으로 퍼즈를 넣던 날들을 떠올렸다. 아나운서 친구들이 고생 많았겠구나. 역시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는 역지사지만 한 게 없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나운서에게 대본을 건네기 전에 먼저 소리 내 읽어볼 텐데.
정수기에서 목을 축여 성대를 촉촉하게 만든 뒤, 두 번째 녹음은 보다 결의에 찬 마음으로, 글에 주인 의식(?)을 갖고 임했다. 푹 잠겼던 목소리와 긴장이 서서히 풀리면서 PD님 말씀대로 첫 번째보다 한결 순조롭게 진행됐다. 살짝 아쉬운 부분들이 여전히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녹음은 무사히 끝났다.
직접 쓴 글을 소리 내 읽는다고 열심히 쓴 글이 갑자기 못나 보인다거나 하진 않는다. 대신 말 그대로 낯설어진다. 새로 산 소설의 첫 장을 넘긴 순간 적응할 새도 없이 갑작스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처럼, 내가 쓴 글도 갑작스럽게 낯설어진다. 대신 그러면서 동시에,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첫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중하게 탐색하는 순간처럼, 단어 한 자 한 자에 애정을 담아 발음하게 된다. 내가 쓴 글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고, 그 글을 적어 내려간 순간의 나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가 소리 내 읽는 글의 '감성적'인 장점이었다면, 이성적인 장점은 글이 조금 더 깔끔해진다는 데 있다. 의식의 흐름대로 영혼의 리듬에 맡겨 글을 적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쓰기도 하고 오탈자를 만들기도 한다. 분명 다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발행 버튼을 누른 순간 치명적인 오탈자가 눈에 띄는 마법.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같은 마법에 매번 걸려든다. 하지만 글을 소리 내 읽다 보면 거슬리는 단어나 문장이 혀에서부터 가로막히기 때문에 이 기분 나쁜 마법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불필요한 문장은 삭제하고 읽는 사람까지 숨찰 만큼 긴 문장은 좀 더 스무스하게 바꿀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교훈을 단 30분간의 녹음 과정에서 깨우쳤다. 다시 주엽역까지 20분을 걸어 1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직접 쓴 글을 소리 내 읽어보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부끄러우면서도 유익한지 브런치 독자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나는 이 글 또한 크고 우렁차게 읽어 내려간 뒤 발행 버튼을 누를 예정이다. 물론 이건 지금 집에 나밖에 없어서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