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고등학교 때 별명이 '성시원'이었다. 성시원은 한때 대한민국에 '응답하라'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드라마 시리즈 '응답하라 1997'의 여고생 캐릭터 이름이다. 그녀는 공개방송에서 '전사의 후예'를 열창하고 금이야 옥이야 모시던 공식 팬클럽 우비가 찢어지자 울고불며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우는 1세대 아이돌 H.O.T의 열성적인 팬이다. 드라마가 방영될 시점에 공교롭게도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고, 어느 남자 아이돌 그룹에 미쳐있기로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그런 별명이 따라붙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나의 취미 중 한 가지는 쉬는 시간이 되면 교탁에 있는 공용 컴퓨터로 달려가 아이돌 그룹의 최신 뮤직 비디오(이하 뮤비)를 트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해상도 480p로 신화의 'Brand New' 뮤비를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던 것을 시작으로, 나의 케이팝 사랑은 엑소가 '으르렁'으로 천하를 평정하던 때까지도 이어졌다. 2013년에 고3이었던 것을 탓해야 할지, 고3 때 공교롭게 '으르렁'이 발매된 것을 탓해야 할 지 나는 고등학교 졸업사진 마저 으르렁의 시그니쳐인 늑대 자세로 찍고 말았다.
당시 좋아하는 아이돌은 따로 있었지만, 아이돌에 관련된 것이라면 누구의 일이든 꿰고 있었다. 스캔들, 사건사고, SNS 등 그 나이 또래 사이에서, 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핫할 법한 이슈를 가장 먼저 접했고 또 전했다. 친구들끼리 TV를 보다가 제법 생소한 아이돌이 등장하면 소속사가 어디인지, 어떤 컨셉인지 설명해주는 것도 자연스럽게 나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모르는 노래도 없었다. 그 당시 엔터테인먼트 3대 천왕이던 SM, JYP, YG부터 그 외 모든 아이돌 그룹의 노래까지, 타이틀곡은 물론이거니와 수록곡도 모두 즐겨 들었다. 지금은 자주 쓰이지 않는 말이기도 하고, 그다지 좋은 뜻도 아니지만 내 안에 내재한 약간의 '홍대병'(대중적인 것보다 남들이 잘 모르는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 기질이 여러가지 음악을 접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도 같다.
2008년 모두가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를 들을 때 같은 앨범에 수록된 '사.계.한'을 즐겨 들었고, 인피니트는 타이틀곡 'B.T.D' 보다 그 다음 트랙인 'Can U Smile'을 좋아했다. 조금 더 윗세대로 올라가면 보아의 노래 중 'Valenti'는 15년째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다. 공교롭게도 세 곡 모두 빠른 템포지만, 어딘가 슬픈 단조 멜로디로 곡이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취향 때문에 윤상의 노래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얘기는 추후 좀 더 길게 해보도록 하겠다.
위에 방금 보았던 것처럼 나의 학창시절에 활약했던 아이돌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 세대로 분류하자면 2세대에서 2.5세대 정도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팬지오디'(지오디 팬클럽명)였던 사촌언니의 영향으로 1세대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 또 사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음악방송을 보는 시간 대비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 아이돌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지 않아 3세대 아이돌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다. 3세대는 엑소를 비롯해 방탄소년단, 세븐틴, 비투비 등이 속한 세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대체, 친구들에게 "너 이 노래도 몰라?"라며 장난식으로 면박을 주던 내가 그 말을 업보처럼 고스란히 돌려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신인 아이돌이 등장하면 인간 나무위키처럼 정보를 줄줄 읊던 내가 달라진 세상에 점차 적응하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헬스장에서 처음 들은 신나는 노래가 요즘 가장 핫한 아이돌 라이즈의 'Siren'이었단 걸 한참 후 알았을 때, 버츄얼 아이돌 플레이브가 단독 콘서트를 매진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명의 발전에 이질감을 느낄 때. 2세대 아이돌의 2.5배를 곱한 5세대 아이돌 관련 콘텐츠가 유튜브 '인급동'(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점령할 때. 어쩐지 2.5배 더 옛날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사람은 평균 33살 이후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익숙한 것만 찾게 되는 노화의 일종이라고 한다. 그 말을 최근에 어디선가 듣고 잠깐 충격에 빠졌다. 나의 플레이리스트가 언젠가부터 따끈따끈한 신곡 대신 추억의 노래들로 뒤덮여버린 것이 취향이 아닌 과학적 현상이었다니! 그러고보니 과거에 비해 음원 사이트에서 최신음악을 들어보는 빈도도 크게 줄었다. 음악을 클릭해서 찾아 듣는 행위마저 막대한 에너지 소모로 느껴지는 낡디 낡은 K-직장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케이팝의 진정한 전성기는 2009년이었다고.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한무대에 서는 시기야 말로 가요계의 르네상스가 아니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도 잠깐뿐. 대중음악이 대중적이지 않게 느껴질수록, 내가 '대중'의 집단에 속해있지 않다고 느낄수록 세대 차이에 대한 실존적 위협은 커져갔다. 동시에 플리 유튜버로서는 직무 유기를 저지르고 있다는 작은 죄책감도 생겼다.
'투어스'라는 아이돌을 알게 된 건 그무렵이었다. 아니, 이름을 알기도 전에 노래를 먼저 접했다. 제목은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아무래도 요즘은 노래 제목을 길게 짓는 게 유행인 것 같다. 청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서 첫 인사를 건네는 이 곡은 활기찬 악기 사운드로 시작하는 도입부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라인이 킥이다. 신세대 아이돌의 노래가 좀처럼 당기지 않았던 내게 이 노래는 "야 너도 5세대 좋아할 수 있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돌 청량 전성시대'였던 2017년을 재현하는듯한 트로피컬한 컨셉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시원 세포'가 되살아나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야, 저 상큼한 아이를 봐. 직캠을 찾아봐. 눈치 빠른 알고리즘은 이미 눈앞에 영상을 퍼다 나르고 있었다. 마침내 조회수 588만회를 기록한 레전드 직캠까지 봐버린 나는 한동안 그 노래를 들을 때 영상 속 베스트 댓글을 떠올렸다.
"첫만남 X나 잘 됐는데 뭐가 자꾸 어렵다는 거야..."
신유(투어스의 비주얼 멤버다. 특징: 매우 귀여움) 덕분에 잠시나마 나는 2012년의 성시원으로 돌아가 최신 아이돌 문화를 향유하는 MZ다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덕분에 최근에는 용기를 얻어 전보다는 적극적으로 최신 아이돌 노래를 감상해보고 있다. 플리 유튜버로써 감을 잃지 않기 위한 훈련이자, 33살이 지나도 '트민녀'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겠다는 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이다. 하지만 보이넥스트도어, 투모로우바이투게더, 키스오브라이프 등등 제법 어려운 영어 단어로 조합된 그룹명을 마주할 때면 그런 다짐이 자꾸 무색해진다. 이름 좀 쉽게 지어주면 안 될까... 닿을 듯 닿지 않는 5세대 아이돌을 향해 읊조려본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