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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 Nov 12. 2024

머라이어 캐리는 이제 그만

플리 유튜버가 겨울을 기억하는 법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탄 후 1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기까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공동현관문의 자동문이 열리기까지 내 엄지 손가락은 한시 바삐 움직인다. 익숙한 위치에 있는 유튜브 아이콘을 누르고 '캐롤 플리'라고 검색한 다음 랜덤으로 눈에 띄는 아무 영상이나 재생한다. 이내 '딩딩딩딩 딩딩딩딩'하는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허스키한 음성의 허밍이 흘러나온다. 


"하아~돈 원 어..."


영상속의 여성이 다섯 글자를 채 뱉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영상을 끈다. 다시 유튜브 피드로 돌아가 산타, 트리 같은 것들이 보이는 썸네일의 영상을 마구잡이로 누른다. 또 다시 '딩딩딩딩 딩딩딩딩'. 이젠 그녀의 목소리가 나오기 전 기계적으로 영상을 탈출한다. 비슷한 행동을 몇 번 정도 반복하니 어느새 나의 발은 공동현관문 앞. 방심한 사이 훅 불어오는 찬바람에 옷을 꼭 여민다. 두 발은 역으로 바삐 향하고 있지만 노이즈캔슬링이 설정된 두 귀는 외부의 소음만 나직하게 들려온다. 어쩐지 찜찜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출근길을 나서기 전에 오늘의 날씨와 기분을 아우를 플리를 찾지 못하면 어딘가 좀 떨떠름하다. 하루의 시작이 영 상쾌하지 못하다. 특히 입동이 들어서는 11월 초 무렵에 내 귀는 종종 갈피를 잃는다. 처음 듣는, 그러나 멜로디와 사운드 이펙트가 '이것은 겨울 노래임'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는 곡들로 계절을 채우고 싶은데,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흘러 나오는 것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아는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여서다. 


계절마다 한 번쯤 들어주지 않으면 서운한 노래가 있다. 봄의 벚꽃엔딩, 여름의 인디고, 또는 쿨 노래가 그러하다. (요즘 Z세대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M과 Z사이에 간당하게 걸쳐진 나는 역시 90년대 노래가 좋다.) 그러니 추운 날 가슴에 넣어둔 3000원을 꺼내 붕어빵을 의무적으로 챙겨먹는 것처럼,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숙제처럼 들어주는 것도 빠질 수 없는 겨울의 연례행사인 셈이다. 특히 계절을 대표하는 노래는 재생하는 순간부터 계절감을 마구 발산하며 오늘의 날씨를 더욱 시즈널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순간, 새로운 곡을 찾아나서는 이유는 그 날의 날씨를 만끽하는 것을 넘어 기억하기 위함이다. 어느 겨울이 아닌 그 해 겨울로 기억하고 싶어서다. 여행지에서 뿌리고 다니던 향수 뚜껑을 우연히 열었을 때 타지에서의 추억이 향기로 끼쳐오듯이 나는 어느 해의 계절을 만난 음악으로 기억한다.




출처 : TBS '이 사랑 데워드릴까요'


작년 겨울 무렵, 한창 일본 드라마에 빠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음악 광인 동시에 드라마 마니아이기도 한 내가 고전부터 최신작까지 웬만한 '한드'를 모두 마스터 하고, 더이상 눈에 띄는 드라마가 없자 시선을 돌린 곳이었다. 왓챠에서 볼만한 드라마를 기계적으로 뒤적이다가 스크롤이 멈춘 건 '이 사랑 데워드릴까요'라는 어딘지 따끈하고 다정한 문구의 제목을 마주했을 때다. 


내용은 흔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클리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여주인공이 어느 날 편의점 사장의 눈에 띄어 디저트 개발팀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렇게 촉이 좋지 못한 나도 다음 장면이 예측될 정도로 뻔한 서사가 이어지지만, 그 유치한 맛에 한번 중독되면 정신 차린 순간 드라마가 끝나있다.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크리스마스를 한두 달 정도 앞둔 드라마 속의 포근한 배경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 그리고 여주인공의 사랑스러운 연기가 지루할 틈 없이 두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매 회 로맨틱한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드라마의 대표 OST, 세카이노 오와리의 'Silent'였다.


노래는 재생하는 순간, 도입부에서부터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종소리로 고막을 간지럽힌다. 때마침 노래 가사의 첫 마디도 '순백의 눈이 내려'라는 서정적인 표현으로 시작된다. 최소한의 반주와 가수의 목소리만으로 이어지던 도입부를 지나 중반부부터는 보컬의 목소리가 여러가지 악기들과 조화를 이뤄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후렴구에 들어서는 하얀 설원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벅차오르는 멜로디가 펼쳐진다.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 극적인 재회를 하는 동안 나는 23년 겨울을 영영 기억할 수 있는 음악을 찾아낸 것이다.


작년 11월쯤부터 한겨울로 접어들 때까지 한동안 같은 곡만 반복해서인지, 지금도 'Silent'를 들으면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16개의 프리퀀시 스티커를 다이어리로 교환하기 위해 집 앞부터 동네 스타벅스까지 미끄러지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갔던 눈길이 생각난다. 혹은 함께 연말 콘서트를 가는 길 애인에게 이어폰 한 쪽을 끼워주며 이 노래를 들려주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계절의 노래를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찾아 헤매는 것은 잊고 싶지 않은 나의 찰나를 조금 더 오래, 선명하게 남기기 위해서다. 


올해는 아직까지 그런 운명 같은 노래를 만나지 못했다. 추억은 켜켜이 쌓여가는데, 그 많은 기억을 담아둘 mp3 플레이어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두 엄지 손가락은 매일 아침 작은 화면 속에서 방황 중이다. 찬바람을 따라 쫓아오는 머라이어 캐리와 마이클 부블레, 존 레전드를 피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24년의 설원을 찾아서. 그런 곡을 발견하기 전까진, 올 겨울도 '2023 겨울 서랍' 속에 간직해둔 'Silent'꺼내 다시 따뜻히 데워 들을 심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03Xa38nfhGw




P.S 세카이노 오와리의 'Illumination'도 'Silent' 만큼이나 서정적이고도 아련한 '제이팝 캐롤'의 맛을 느낄 수 있다. Silent를 무한 반복 재생할 무렵, 알고리즘이 소개시켜준 소중한 곡이다. 가사가 아름다워서, 해석과 함께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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