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능한 나와 당신이 해야 할 일
나는 아침잠에 유독 취약하다. 매년 첫 번째로 적는 새해 다짐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일 정도다. 알람을 5분 단위로 20개씩 맞춰도, 목표 달성 앱에 참가비를 지불하고 기상 미션을 신청해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더더군다나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일어날 명분도 없다.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그러니 이른 아침에 운 좋게 눈을 떴더라도 다시 스르르 눈꺼풀을 닫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녕 백수 탈출에 성공하기 전까지 새벽 공기의 상쾌함을 누릴 수 없는 것인가. 이렇게 '잉여 인간'이 되어가는 것인가. 올해도 아침 운동은 실패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절망하려던 찰나, 어느 날 갑작스레 퍼진 역병으로 나에게 아침에 일어나야만 하는 '명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 연휴쯤이었을 것이다. 아직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세 자리를 넘어가지 않고 전국적으로 창궐하지 않았을 무렵, 엄마는 혹시 모를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소셜커머스 사이트에서 KF94 마스크 50매를 4만원에 구매했다. 개당 800원에 구매한 셈이니 지금 생각하면 감지덕지다.
평소라면 2~3일 안에 배송이 완료되기에 며칠이면 오겠거니 생각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다 웬일인지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길래 구매 사이트에 재접속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똑같이 50매에 8000원을 더 붙여서 판매하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마스크 주문량이 폭증했는지 같은 날 오후에는 2만원이 더 올라 6만8000원이 되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마스크 폭리가 시작되었고, 일부 업체는 가격이 인상되기 전에 구매한 소비자들의 주문을 취소했다.
엄마가 주문한 업체는 다행히도 악질(?)까지는 아니었는지, 가격을 인상하긴 했지만 이전 주문 건들을 취소하지 않았다. 며칠 후 현관 앞에 무사히 도착한 택배 박스를 보며 당분간은 괜찮겠다 싶어 안도했다. 50매 중 20장을 할머니께 드리고 남은 것은 KF94 30장과 미세먼지가 한창 난리일 때 쟁여두었던 마스크 몇 개들 남짓이었다. 그렇다, 내가 생각한 '당분간'은 고작 한 달 정도였다. 한 달이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오산이었다. 대구에서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 개학이 2주가량 미뤄졌다. 넉넉하게 채워져 있던 마스크 바구니는 서서히 빈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해 보였다. 다만 내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점은, 엄마가 중국산 마스크 10장을 8만원에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니, 그걸 왜 그 돈을 주고 사냐고."
"○마켓에선 이것밖에 안 파니까 그렇지."
"그러게 내가 산다고 했잖아, 비싸게 사지 말라니까."
"어떻게 사, 요즘 마스크 파는 데가 어딨다고…"
잘못은 중국산 마스크를 8만원에 판 양심이 중동 간 업자에게 있는데, 정작 언성을 높인 대상은 엄마였다. 답답하고도 속상한 감정이 뒤죽박죽 엉켜서 마음을 헤집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명분이 생겼다. 나는 마스크를 사야만 했다. 그 말은 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종의 생존본능 같은 것이 일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알람이 없어도 오전 9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을 뜨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판매하는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마케팅'(마스크+티켓팅)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거의 아침마다 이뤄졌다. 주로 9시나 9시 30분, 10시 정도에 물량을 풀었다. 어떤 곳은 오전 8시부터 판매를 시작해 나를 굉장히 힘들게 했다. 덕분에 나는 매일 아침 안대를 이마에 올려 고글처럼 쓴 채 '광클'을 해야 했다.
당연히 처음 며칠 동안은 실패의 쓴맛을 맛봤다. 나름 아이돌 팬덤 활동 경력이 있어 티켓팅 비스무리한 것은 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우젓'들끼리 하는 경쟁과 전 국민이 하는 경쟁은 규모부터가 달랐다. 무엇보다 '구매하기' 버튼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광클을 하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패전할 것임을 알면서도 전장에 뛰어드는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날은 구매하기 버튼을 봐놓고도 습관적으로 'F5'를 눌러서 기회를 허무하게 날린 적도 있었다.
이른 기상이 무색하리만큼 수확없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초점 없는 동공으로 새로고침을 하던 중 초록 색깔의 '구매하기' 버튼이 나타났다. 그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그렇게 마스크 5장을 구하고, 연이어 10장을 더 구매했다. 같은 날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다가 마스크 두 장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 서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접했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나의 '아침형 인간 일지'는 여기서 끝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뒤이어 시작된 감자 대란은 나를 또 한 번 침대에서 일으켰다. 강원도 감자 10kg을 5000원에 판다는데 안 살 수가 있나. 심지어 배송비 포함이다. 이 기막힌 소식을 엄마에게 신이 나서 말해버리고 난 뒤에야 입방정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해줄 거지?'하고 말하는 듯한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은 엄마가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어도 '포켓팅'(포테이토+티켓팅)에 참전할 요량이었다. 입방정을 떨기 며칠 전 엄마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마트에 갔는데 감자가 5~6알에 4000원이라 못 샀어. 감자가 너무 비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비싼 감자를 인터넷에서는 한 아름이나 살 수 있는데 어르신들은 이 소식을 알고나 있을까.
마스크 전쟁을 몇 차례 겪어낸 덕분인지, 감자는 비교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 박스를 구매하고, 며칠 뒤 또 한 박스를 더 샀을 정도니 말이다. 처음으로 성공한 날이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엄마는 당연히 실패할 줄 알았는지 포켓팅에 전념하고 있는 나를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나 성공했어'라는 말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응, 이거 봐. 입금도 다 했어."
"와, 대단해 우리 딸. 진짜 짱이다. 근데 조금 슬프네."
칭찬 다음으로 이어진 엄마의 말이 예상 밖이라 살짝 벙쪘다. 뭐가 슬프냐고 묻자 감자 하나 사는 데 이렇게 손이 빨라야 하면 나는 절대로 못 할 것 아니냐며, 그게 슬프다고 했다. 그 대답에 며칠 전 기사로 본 할머니 사진과 마트에서 감자를 들었다 놨다 하며 망설이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했지만 왠지 맘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되면서 마스크 수급이 어느 정도는 안정되어가는 추세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사이트나 앱을 통해 실시간으로 재고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몹시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인터넷으로 저렴하게 감자를 판매하겠다는 아이디어도 마냥 좋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힘든 와중에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유쾌한 문화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또래만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엄마는 아직도 마스크 재고 현황을 알려주는 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약국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거나 복불복 게임을 하듯 일단 약국 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엄마라고 마스크를 8만원이나 주고 사고 싶었을까. 피곤하게 동네 약국을 돌아다니고 싶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나마 인터넷에 능한 유일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포켓팅에 참전할 수 있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마스크 전쟁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저녁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쉽게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엄마에게 마스크나 감자 따위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