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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May 13. 2024

8.자존감 올리는 취미생활, 차밍스쿨.

<직업이 아닙니다. 그저 즐기려는 취미활동일 뿐>


취미가 뭔가요?

“제 취미는 골프.”

“제 취미는 캠핑.”

수영, 사이클, 요가, 영화감상, 독서, 여행…….우리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취미활동은 이런 신체 활동을 동반한다. (위의 것은 예시일 뿐. 나는 캠핑을 싫어하며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그러나 취미가 모델 놀이라면 어떨까?

“제 취미는 모델놀이입니다. 왜냐하면 정식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죠. 즉 모델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재밌게 놀아보려고 모델 클래스를 듣고 있습니다.”


160cm 모델 키로는 한참 부족하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언니들도 160 언저리의 키다.

이 신장은 한국 여성 평균키 정도일 뿐이니, 모델이 되기에 적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시니어모델 지원 자격은 160cm 이상으로 비교적 관대한 키 조건을 갖고 있다.

시니어모델은 키, 몸무게 등의 신체 요소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연륜의 매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모델 현장에서 일해 본 경험도 없을뿐더러 내가 프로들의 전업 세계까지 가보지 않아서 키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하기는 어렵다.


이 수업을 같이 듣는 시니어 선생님들은 수십 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은퇴하신 분들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쉼표를 찍고 여유를 부려도 된다는 말이다. 노후에도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 수도 있지만 이제는 조금 즐거운 일을 찾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시니어들은 즐거운 취미생활을 위해 이곳에 모여 함께 도전을 하고 있다. 그 취미가 전업으로 이어져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실 오랜 세월 사회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을 돌보는 자유롭고 재미있는 시간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한 선생님이 며칠 전에 그랬다.

"난 이 수업 자존감 높이려고 듣고 있어. 이걸로 모델 일을 할 수 있건 없건 중요한 게 아니야. 계속하다가 자존감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 그냥 그만둘 거야."

나도 무척 공감이 되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모든 취미활동을 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사회활동 = 돈 이라고만 연결하는 순간 우리는 많은 불행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활동에는 나의 즐거움, 자신감 회복, 건강관리처럼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오히려 쓰게 되지만 나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사실 나는 다른 선생님들처럼 이 모델 클래스를 즐기지 못했다. 매주 수업이 너무 재밌다는 선생님들을 보며 살짝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직 은퇴를 하지 않았으므로, 전업과 취미가 복합적으로 얽힌 이 시간들이 살짝 버겁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전 반차를 쓰고 수업을 듣는 내내 회사에서 오는 연락으로 불안에 떨었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들과 식사 한번 할틈 없이 회사로 달려갔다.

수업에서도 굉장히 재능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힐을 신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걷는 것도 못하는데 워킹이라니. 15주간의 비기너 수업 때는 자존감 회복은커녕 자존감이 더욱 떨어졌다.

이제 사회경력은 쌓였으니 내가 비기너라는 위치에 있을 일이 별로 없는데, 모델 수업만 오면 실력이 바닥이라 겸손해지고 워킹을 잘 못해서 죄송하고 내가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사실 어떤 것을 즐기려면 그걸 좀 잘해야 한다. 너무 실력 없이는 재밌기가 어렵다. 

그래서 초보들이 어떤 영역에 들어갔다가 쉽게 그만두는 이유는 즐길 정도로 잘하기 전까지는 재미가 전혀 없고 힘만 들며, 때론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들을 자주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잘해서 프로페셔널 영역으로 가면 또 괴로움이 동반된다.

재밌게 즐기는 위치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골프에서도 프로들의 세계는 엄청 치열하고 스트레스도 많다. 넷플릭스 다큐 ‘풀스윙’을 보면 프로선수가 겪는 정치싸움, 인간들로부터 얻는 스트레스, 실력이나 실수에 대한 괴로움이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히 멋진 플레이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선수에서 벗어나 레슨강사가 된다고 해도 업의 영역이므로 많은 회원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힘든 순간들이 많을 것이다. 골프를 가장 재밌게 즐기는 사람은 아마추어 중에서 아주 잘 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비기너 단계의 골린이에게 골프는 재밌기보다는 괴로운 노동이며 지루한 연습을 거듭해야 하는 자기와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 잘하게 되면, 그제야 골프로 즐거운 시간들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이 모델 일은 뭘까?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 몸의 활동은 성공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목표와 경제활동을 하는 기능으로 사용했다. 물리적으로 몸을 어떤 장소에 출근시켜 돈을 벌고 내 몸을 이용하여 일이나 공부를 잘하게 푸시하는 과정에서 나를 괴롭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몸을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매력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일하는 기계 같은 삶으로 육신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모델 수업을 통해, 내 목표나 위치와 상관없이 내 몸의 좋은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웃는 모습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평생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그동안 이유 없이 웃을 일이 전혀 없었다.


이 모델 놀이가 취미가 아니라 업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다시 지금 직장생활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반복될지도 모른다. 이제야 재미를 느끼는 즐거운 취미활동에서 경제활동에서 수반하는 괴로움을 끌여들이 고 싶지 않다. 요가를 하듯~골프를 치듯~ 나는 모델클래스에서 즐거운 시간만 확보하고 싶다.

인간이 어떤 업의 영역에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딪히고 이겨내야 할 괴로운 순간이 많다. 그 시간들을 이겨내며, 비로소 조금씩 성장하고 탁월해지며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진다.

그런데 취미 활동이라는 영역으로 두면 딱히 괴로울 일이 없다. 취미에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부딪혀 이겨낼 필요가 없다. 그냥 그만두거나, 쉬었다 가면 그만이다.


살아가는 과정에 이것이 아니라도 괴로울 일이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래서 취미로 하는 일에서까지 괴로운 시간을 견뎌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 수업을 시작한 이유도 내 소장품들을 예쁘게 입어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성장과 변화가 목표였던 것은 아니었다. 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었지만, 그로 인해 괴롭고 힘들 일도 참 많았다. 내가 혼자 잘 나가게 되면, 필히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좋게 유지되지 못한다. 업의 영역에서 잘하는 것은 때로는 괴로움이며 또 못하는 것 역시 괴로움이다. 뭘 해도 힘든 상황들이 동반된다.

그래서 이 모델활동이 취미생활로만 남겨지는 것이 오히려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요가나 골프처럼 모델놀이도 취미생활로 꽤 괜찮은 영역이다.

자신을 끝없이 관찰하여 나만의 스타일이나 개성을 찾아내며 육체적인 매력도를 연구하는 것이 가능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최적으로 멋진 자신의 모습을 찾기란, 혼자서는 조금 쉽지 않다. 그러나 모델 클래스의 전문가들과 함께 멋진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마치 ‘중년들을 위한 차밍스쿨’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내 차밍을 찾는 공부를 통해 그간 막연히 나이 드는 자기 신체의 단점에만 집중했다면, 내 몸의 장점을 찾고 사람마다 다른 매력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갖게 된다.


모델 클래스를 들으며, 한 사람 한 사람 각양각색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 매력을 찾는 것이 자존감을 지키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매력과 아이덴티티가 있고 존재로써 가치가 있다는 느낌이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실 외적인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쉽다. 우리는 도 닦는 도인이 아니므로 기도와 참선만으로 자기애가 충만해지기 쉽지 않다. 

스스로 멋진 모습을 찾고 비주얼적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


그간 회사일, 능력 향상에 대한 고민으로 수십 년간 나를 압박하는 삶으로 살아왔다. 늘 더 나은 모습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즐길 틈이 없었다.

탄소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면 다이아몬드가 되듯 업무량이든, 인간관계든, 업무에서 생기는 수많은 고통과 압박들은 나를 더욱 나은 디자이너가 되게 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새로운 영역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라고 하면 조금 망설여질 것 같다.


시련 따위 모를 나약한 코스모스가 아니라 짓눌릴 대로 짓눌려 결국은 스스로 반짝이는 보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석을 만드는 과정은 아름답지 못했다.

취미생활에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나는 이 모델놀이를 취미로 즐기는 지점까지만 유지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영역에서 모델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모델 + 디자이너

모델 + 공무원

모델 + 비즈니스맨

모델 + 교사

심지어 은퇴한 시니어, 취미는 모델놀이…얼마나 멋진가?

자기만의 시그니처 모델 영역을 구축해서 즐기면 그만이다.


모델 수업이 적성에 안 맞고 회사 생활과 병행하기에 시간 소요가 많이 되어 그만 둘까 했지만 결국 전문반까지 등록해버렸다. 전문반으로 올라가니 더 재미있는 수업이 많다.

직장에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주 재밌는 모델놀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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