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집순이에게 외출은 비장한 목표가 있어야 함>
쾌적한 저녁 산책을 위해 선선하고 더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의미 없이 걷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즉 내 인생에 그냥 산책은 없다는 것.
동네를 거니는 산책 자체가 나에게 목적이 될 수 없다.
사실 홀로 산책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기 때문에 일상에서 손쉽게 추천하는 심리 안정법이긴 하다.
걷기는 명상할 때와 마찬가지의 휴식과 안정의 알파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다들 명상을 어려워하니 산책이라도 자주 하는 것은 좋은 스트레스 관리법이다.
원래 산책에는 목적지도 의미도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내게 유유자적 한가로움 뒤에 만족이 따라오지 않는다. 산책에서도 보람과 효율을 찾는 미친 현대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한 번의 외출로 밀린 모든 미션을 완수할 때.
집순이인 나에게 외출은 큰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미 없는 산책을 위해 굳이 외출을??(사실 의미 없지 않다. 위에서 설명했듯… 알파파…)
산책이 무슨 외출이냐 싶겠지만.
집 밖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아는 사람 얼굴이면 스트레스가 더 커짐.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점원과 대면하는 것도 괴롭다. 그래서 나는 키오스크를 사랑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나는 어떻게 태어난 게 이렇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지.
직장 생활 전에는 나도 사람들을 참 좋아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인간에게 희망을 잃었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말로 나에게 성악설이 무엇인지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내가 무능해도, 유능해도 세상은 미워한다.
게으른 사람만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성실해도 일 키우고 혼자 튀고 나댄다고 싫어한다.
그냥 직장에서는 모든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미움을 받기 위해 다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 버티자. 세상이 주는 미움의 기본 값을 받아들이자.
내가 미움받는 만큼 나도 미워하고 공평하게 서로 미움을 공유하면 덜 억울하니 그냥 같이 미워하는 걸로 퉁치자.
돌 하나 맞으면 나도 돌 하나 던지고.
이렇게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니 좀 지쳐간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롭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나를 미워하는 직장동료들, 나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익명의 행인들. (진실로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말을 공감한다.)
이제 미워할 에너지도 없고, 미움을 온몸으로 받을 기운도 없다.
그냥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평온하게 살고 싶을 뿐.
타인의 말도, 타인의 시선도 피곤하기만 하다. 남이 싫을 때는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조차 짜증 날 때가 있었다.
아무도 안 만나고 조용히 집에만 갇혀 살고 싶다. 그래서 집안에 나를 셀프감금하는 것을 지향한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하나도 답답하지 않다. 한 달 내내 외출 금지령을 내린다면 괴롭기보다 너무 행복할 예정.
여행이나 외출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는커녕 스트레스만 가득 안겨준다.
낯선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인가? 관광지의 인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난다.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더라??
그래도 멘털 건강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기 전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녀놔서 억울하진 않다. 앞으로도 집순이로써 쭉 과거의 여행을 추억만 하며 살 예정.
지난 주말 남편은 직장 동료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같이 가자고 안 해서 너무 좋았다.
오히려 집에 혼자 있는 것이 평화로워서 좋기만 하다. 심심함 그게 뭔데? 나는 집에서 고양이들이랑 혼자서 노는 게 제일 재밌다.
가끔 외출해서 쇼핑하고 외식하고 집에 돌아올 때 이상한 허무한 마음이 있다. 의미 있는 걸 한 것 같지 않은데 시간을 낭비한 느낌.
그런 나도 가끔 저녁 외출을 한다. 외출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총 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다.
그냥 걷는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집을 나서는 길은, 짧은 산책을 즐기기 참 좋다.
오늘의 산책 목적지는 두 군데다.
하나는 도서관, 다른 하나는 슈퍼마켓.
문닫힌 도서관 앞에 설치된 도서 반납함에 다 읽은 책을 넣었다.
그리고 10분 거리에 있는 동네슈퍼마켓까지 걸어가서 맥주를 샀다.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는 산책길은 참으로 산뜻하다.
이렇게 짧게라도 집 밖에 나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지만, 주말 저녁에 가끔 이렇게 혼자 나와 소일거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보는 밤하늘은 즐겁기도 하다.
늦은 저녁이라 길거리에 사람도 거의 없다.
조용한 골목을 혼자 걷는 시간이 만족스럽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다.
건전한 나의 독서 취미와 불건전한 음주 취미, 짧은 생각정리를 모두 충족하는 만족스러운 짧은 산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