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륙.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by 하임

승객 여러분.


독자 여러분.


청주 국제공항에서 방콕 돈므앙 공항으로 가는 저희 비행기는 곧 이륙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세이의 프롤로그가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에필로그에 안전하게 착륙할 때까지 페이지를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륙은 여행의 프롤로그다.


누군가는 '여행은 계획과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부푼 마음으로 여행지를 검색하고, 항공권, 숙박, 경로 및 전체 일정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여행지에 있는 듯한 기분을 미리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국 전날 백화점 면세점 쇼핑의 기쁨과 설렘은 그야말로 일종의 덤이다.


하지만 내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의 이륙부터다.

다른 사람처럼 여행의 기분을 미리 경험할 준비 기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혼자 떠나는 경우엔 보통 출국 일주일 전. 짧으면 3일 전에야 비로소 여행을 결정하고 항공권을 예약한다. 준비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고, 세부일정은 현지에서 결정한다.


세밀한 계획 없이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게 누군가에겐 불안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일상과 여행의 큰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세밀하게 짜인 일정은 일상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여행에서까지 계획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엔 자유가 있다. 애초에 오랜 시간 들여 준비한 계획이 없으니, 그것이 틀어졌을 때 받는 스트레스도 없다. 모든 것은 현지 상황에 따라 나타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다. 나에게 힐링은 고급 리조트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이런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한 유연함에서 비롯된다.


목적지를 정하면 항공권 가격 비교 앱에서 가장 저렴한 비행 편을 예약한다. 번거로움을 감수할 수 있는 기회비용의 범위라면 경유하는 항공편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유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경유하는 공항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고립된 여행지라고 생각한다.

큰 허브 공항이라면 면세점을 구경하는 작은 재미가 있고, 현지의 유명한 브랜드 카페를 찾아 커피 맛을 경험할 수도 있다. 공항에 현지 카페가 없다면, 어느 공항에나 있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여기서는 얼마에 판매되는지 스벅지수를 확인해 본다. 예전에는 빅맥지수를 확인했지만, 맥도널드보다 스벅을 더 자주 가는 나는 스벅지수에 더 관심 많다.

자판기 구경도 재미있다. 공항 자판기에는 그 나라에서 유명한 과자와 음료가 비치되기도 하니깐, 운이 좋으면 우리나라에서 본 적 없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맛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6시간 정도는-그 이상은 나도 힘들다-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환승한 두 번째 비행기에선 첫 번째 비행기와 기내식도 비교 경험할 수 있다. 직항은 빨라서 좋고, 경유는 색다른 경험과 함께 절약한 항공비로 더 오래 여행할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여행은 직항을 예약했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 중에 청주 국제공항에서 돈므앙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가장 저렴했다. 심지어 KTX를 타고 청주 공항으로 가서 출국하더라도 현지에서 하루 더 숙박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남았다. 이 정도면 청주공항을 선택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도착 공항이 방콕의 주관문인 수완나품이 아닌 돈므앙이지만, 다행히 밤 10시 30분인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도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가 밤 12시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따로 택시비가 들지 않으니 최적의 조건이었다.


출국에 앞서 한국의 시내 환전소를 통해 태국에서 이틀정도 사용할 수 있는 돈만 환전했다. 태국의 현지 환율이 국내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태국에선 100달러보다 5만 원권 원화 환율이 더 좋다고 했다. 가성비 따지는 나로서는 완벽한 여행지다. 이중 환전비용이 들지 않으니.


환전한 약간의 태국 돈과 5만 원권을 넉넉하게 지갑에 넣었다. 이제 짐만 챙기면 여행 준비 끝이다. 방콕에서의 첫째 날 숙박은 청주공항으로 가는 KTX안에서 예약한다. 여행 첫날 숙소 예약 내역과 돌아오는 항공편 예약내역만 보여주면 입국 심사 통과에 문제없다. 그러니까 내 여행의 준비는 입국심사 통과를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갖추는 것이 전부다. 나머지 일정은 현지에 도착한 후 결정하면 된다.


사실, 스티브 잡스가 검은 목티를 입고 무대에 올라 손 안의 작은 휴대폰을 공개하기 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그때는 가는 곳마다 예약 내역을 일일이 종이로 프린트해서 보여줘야 했고, 인터넷은 컴퓨터로만 가능한 시대였기에 출발 전에 미리 이동경로와 숙박시설까지 모두 계획하고 예약을 마친 후 출국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여행의 준비는 정말 간편해졌다.

돈과 스마트폰, 그리고 여권. 딱 이거 세 가지만 있으면 당장 오늘 오후라도 떠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통장에 잔고만 많다면 따로 짐쌀 필요도 없다. 현지 제품을 구입하면 되니깐. 만약 로또 1등이 당첨된다면 가벼운 백팩 하나만 메고 떠나는 그런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 아마도 스마트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 중에 한 명은 나 같은 고독한 여행자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내 설렘은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릴 때야 비로소 시작된다.




어둠으로 가득한 저녁 시간.


청주공항.

이륙을 준비 중인 돈므앙행 티웨이 항공기의 날개 창가 자리에 나는 앉아있다.


차갑고 선선한 바람이 기내로 흘러 들어온다.

스마트폰을 비행 모드로 설정하고 안전벨트를 확인하라는 안내방송이 기내 스피커에서 울린다.

거대한 엔진의 숨결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엔진의 떨림일까. 내 심장의 떨림일까.


드드드드드득.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달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기체의 진동이 점점 거세진다.

마치 내 두발이 활주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질감이 신발 바닥에 전해지는 듯하다.

비행기는 땅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함께 힘차게 도움닫기 한다.


커다란 바퀴를 쥐고 있던 활주로가 손을 놓는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무료한 일상이 손을 놓는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기체의 떨림이. 거친 소음이. 사라진다.


눈을 뜬다.

비행기는 점점 땅에서 멀어져 하늘에 가까워진다.

창가에 기대어 가만히 하늘 아래 풍경을 바라본다.

거대했던 지상의 건물들을 밝히던 불빛들은 점점 작아져 별이 되었다.

땅 위에 별들이 반짝인다.


늘 올려다보던 별들이 발아래에 있다.

늘 여행을 갈망하던 내 하루하루가 발아래에 있다.

하늘과 땅이 바뀌었다.

일상과 꿈이 바뀌었다.


그토록 원했던 여행의 꿈.

날개에 닿는 부드러운 기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여행의 시작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