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밤 10시 30분.
비행기는 가을의 나라에서 여름의 나라로 안전하게 도착했다. 나는 기내에서 입고 있던 바람막이 재킷을 백팩에 넣고 반팔 차림으로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마쳤다.
평소 같으면 기내의 승객들이 먼저 내릴 때까지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 거린다. 얼른 내려서 '태국 유심칩 개통'이라는 미션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도착 비행기라 서둘러 밖으로 나가더라도,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찾으면 11시는 넘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통신사들이 영업을 하고 있을까? 출국 전 이 부분이 가장 큰 불안요소였기에 한국에서 미리 정보를 검색해 봤었다. 다행히도 공항 내 통신사들은 더 늦은 시간에도 영업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한국이 아니다. 인터넷에선 영업한다고 안내되어 있지만 실제로 도착했을 때도 그러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이전에 베트남에선 분명히 어플을 통해 예약한 호텔이 누락되어 있던 경우도 있었다-여행지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인터넷 정보와 실제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여러 방법을 검색해 본 결과 한국에서 여행 어플을 통해 미리 현지 통신사의 유심을 예약 결제하고, 현지 공항의 통신사에서 개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령지는 돈므앙 공항 지점. 도착 예상시간은 밤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쯤이라고 업체에 따로 메시지도 남겨뒀다.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긋나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찾아 공항의 로비로 나왔다. 시계는 11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정면에는 태국의 통신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들은 현금 다발을 세고, 매장을 청소하는 등 업무 마감으로 분주해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싸와디캅" 인사와 함께 미리 캡처해 둔 예약 번호 페이지를 직원에게 보여줬다. 직원은 서랍에서 유심칩을 꺼내어 능숙한 솜씨로 재부팅을 반복하며 작동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유심칩은 빠르게 잘 작동했고 나는 "코쿤캅" 짧게 인사한 후 스마트폰을 돌려받았다.
아직 공항버스를 타야 하는 미션이 남았지만, 가장 신경 쓰였던 불안요소가 제거됐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내 차분해졌다.
여권, 돈, 스마트폰. 해외여행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 모두 갖춰졌다.
이제는 어떤 돌발상황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다.
공항의 6번 출구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확인했더니 11시 40분. 버스의 막차 시간까지 20여분 남았다.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깊게 심호흡을 한다. 방콕의 미지근한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운다. 엄청 무더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태양이 사라진 밤공기는 견딜만했다. 이제야 태국에 온 실감이 난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긴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도 추위에 몸을 움츠렸었는데, 지금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음에도 텁텁한 무더위의 흔적이 느껴졌다.
기다리는 동안 버스 정류장의 안내판을 살펴봤다.
공항버스 정류장엔 A1, A2, A3, A4. 총 4대의 버스가 정차했다. 한국의 지하철 노선처럼 각 버스마다 고유의 색이 있고, 각자의 색으로 노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탈 A1버스를 제외한 다른 버스는 11시에 모두 운행을 종료한 상태였다.
정류장에는 나 말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그룹이 더 있었다.
나이 든 여성 한 명, 젊은 여성 한 명 그리고 그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한 명. 간간이 들리는 그들의 음성은 한국어였고 방금 도착한 비행기는 한국에서 방콕으로 온 비행기뿐이니깐 한국인 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에게 인사하며 이곳이 방콕 시내로 가는 A1버스를 타는 정류장이 맞는지 물었다.
"나도 처음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버스 정류장에 적혀있는 버스 리스트를 봐선 여기가 맞는 거 같아요."
"아. 네."
"어디까지 가세요?"
"모칫역이요."
"아. 저도 모칫역 가거든요. 그럼 여기 A1 버스 같이 타시면 될 거예요."
그는 다시 일행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흔히들 해외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더 친근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해외에선 한국인이 오히려 더 조심스러웠다.
외국인인 경우는 먼저 다가와 자잘한 스몰 토크를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오히려 필요한 이야기 이외의 개인적인 영역은 명확한 선을 긋는 것 같다고 할까.
아마도 어렵게 시간 내어 해외에 나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한국과 비슷한 환경에 노출되기를 원치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나는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상대가 허용하는 거리를 가늠하면서 소극적으로 대하는 편이다.
12시가 지났다.
하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10분이 더 지나갔다. 숫자가 더해질수록 조금씩 불안함도 커져갔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버스 끊어진 거 아닐까요?"
나도 오늘 처음 이곳에 도착했으니 알리가 없을 거라는 걸 알겠지만 아마도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리라.
확실치는 않지만 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늦는 경우가 많으니깐,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12시 45분까지는 기다려볼 생각이다.
야간 시간이라서 차가 막히진 않을 테니 한 시간 이상 늦지는 않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늦게 오더라도 화가 나지 않을 시간을 45분으로 정했다. 로마에선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해외에서 한국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돌아오는 것은 스트레스밖에 없다. 45분의 기다림은 나에겐 일종의 심리적 시차 같은 거다. 경도 15도마다 1시간의 물리적 시차가 존재하듯이 각 나라마다 심리적 시차라는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구 반대편에 가서 왜 한국은 낮인데 여기는 밤시간이야! 외쳐봐야 아무 소용없듯이 심리적 시차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45분 정도의 공간을 비워두면, 시간 개념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적다. 내 나름의 여행의 팁이다.
뜨거운 태양이 저문 밤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버스는 12시 20분이 조금 지난 후 모습을 드러냈다.
25분밖에 늦지 않았으니 예상했던 45분보단 훨씬 빨리 도착했다. 이 정도면 럭키비키 아닌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찬 버스 안은 쾌적했다.
한국인 가족은 버스의 앞쪽에 앉고 나는 내리는 문 뒤쪽에 앉았다.
버스의 앞쪽엔 도착지 정보를 표시하는 LCD 모니터가 보였다. 하지만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가는데도 글자가 바뀌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장 난 거 같다.
서둘러 스마트폰의 GPS를 켠 후 구글 지도 앱을 실행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도착해야 할 정류소를 지도상으로 미리 파악해 뒀기 때문에 GPS가 그 근처에 다가가면 내릴 예정이다. 나와 함께 탄 한국인 가족도 같은 정류소에 내린다고 했으니깐 내가 내릴 때 알려주면 될 것이다.
GPS의 동그란 점이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하차벨을 누르면서 한국인 가족에게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알려줬다.
우리는 함께 정류소에 무사히 내렸다.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했고 나는 즐겁고 안전한 여행되시라고 인사한 후 구글 지도를 다시 켜서 뱅글뱅글 도는 화살표를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맞춘 후에 걷기 시작했다.
미리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까지는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큰 도로를 따라 10분 넘게 걸어가야 한다.
길이 너무 어둡고 위험하면 택시를 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큰길의 대부분이 공사구간이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방콕의 어둠 속에서, 밝은 하얀색 조명 아래에 주황색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인부들이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여기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이렇게 야간공사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해외에서의 야간공사. 특히 동남아에서의 공사 현장은 낯설다.
몇 년 전 동남아에 거주하며 어학원을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사장님은 어학원의 신관을 짓고 있는 중인데, 예정된 완공 기일이 한참 지났지만 언제 공사가 끝날지 가늠할 수 없다며 속상해하셨다. 한국은 정해진 기한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거나 앞당기려고 노력하는 반면 이곳은 그렇지 않다고. 예정된 완공 기일을 넘기는 일은 너무 흔하고 업무시간에도 현장에서 직접 감독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 하는지 신뢰하기조차 힘들다고.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의 대화가 워낙 강렬했고, 현지에서 생활하시는 분과의 대화는 그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나는 모든 더운 나라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쉽게 일반화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을 보니 색다르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다.
어두움을 환히 밝히는 작업용 하얀 조명은 마치 태국의 밝은 미래를 비추는 듯 보였다.
꽤 열심히 일하는구나 이 나라도.
덕분에 나는 숙소로 가는 상당한 구간을 밝은 불빛 속에서 걸을 수 있다. 마치 내 안전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이벤트처럼.
밝고 하얀 불빛을 뒤로하고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의 어둠을 2~3분 정도 더 걸어가자 GPS의 화살표는 내가 설정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하얀 철문이 있고 그 너머엔 'ㄷ'자 모양의 건물이 보인다. 하지만 건물로 들어가는 길목의 철문이 닫혀 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그럴까.
호스텔 예약 메시지로 12시 넘어서 도착한다고 미리 말해뒀었는데..
스마트폰의 후레시 기능을 켠 후 철문의 좌우를 살핀다. 초인종은 물론 그와 비슷한 어떤 버튼도 없었다.
지금까지 멀쩡 했던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혹시 호텔 매니저에게 연락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철문에 등을 기대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문이 쓱 열렸다. 캐리어를 한 손으로 잡고 있었기에 다행히 뒤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뭐야. 굳게 닫혀있던 척하고 있었던 거야?
황당했지만 어쨌든 열려서 다행이다. 나는 철문 안으로 들어간 후에 다시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안쪽에서 철문을 밀어 닫았다.
철문 안에는 여러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불 꺼진 간판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호스텔을 발견했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다.
카운터 안쪽에도 아무도 없다.
1층 전체를 둘러봤지만 직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짐들은 바닥에 내려놓고 로비의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어쨌든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꽤 오랜만에 나오는 해외이기도 했고, 특별한 준비 없이 떠나야 했기에 은근히 긴장했었나 보다.
나는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건물 마당을 멍하니 바라본다.
창밖은 빛은 물론 소리까지 잠든 듯 검고 조용했다.
얼마만의 고요인가.
청주 공항에서 저녁식사로 먹은 떡만둣국이 아직 다 소화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 앉아있다. 다른 사람들, 다른 계절, 다른 공기. 다른 언어, 다른 지폐. 완전히 다른 세상. 마치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새로 산 스케치북의 첫 페이지를 넘길 때 기분처럼 모든 것이 새롭다.
한국에서 매일 반복되던 습관성 일상에 굳어버린 내 마음의 자물쇠가 찰칵하고 풀린 듯 자유롭다.
그때 자동차 엔진소리와 함께 두 개의 동그란 불빛이 로비 내부를 환희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불빛의 족적을 찾아 일어섰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꺼진 자동차의 오른쪽과 왼쪽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여성이 터질 듯 속이 가득 찬 비닐봉지를 들고 내리고 있다.
곧이어 호스텔의 유리문이 열렸고 가득 찬 비닐봉지는 리셉션 카운터 위에 올려졌다.
먼저 들어온 여성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신을 호스텔의 주인이라고 소개한 후 나에게 예약한 손님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다고. 조식에 필요한 빵과 재료를 사러 마트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나도 방금 도착해서 얼마 기다리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하며 이 시간에도 문 연 마트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숙소로 오면서 봤던 공사현장이 오버랩 됐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누군가가 동남아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태국에는 늦은 시간까지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여권을 보여줬고, 호스텔 사장님은 계속해서 친절한 미소로 나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6인이 사용하는 도미트리의 1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사장님은 숙소 내부의 공기질과 온도를 체크하고 에어컨과 환풍기를 조금 더 강하게 조절했다. 이어서 욕실과 화장실 위치와 사용방법을 안내받았다.
늦은 시간이라 많이 피곤할 텐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친절함과 미소.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의미의 세계 공통어다.
누군가가 여행객 한 사람 한 사람은 민간 외교관과 같다는 표현을 하던데, 그 반대로 여행객을 맞이하는 한 사람 한 사람도 그 나라의 민간 외교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태국에 도착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태국이 좋아지려 하니깐.
나는 침대의 커튼을 친 후 조심스럽게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후 침대의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예상보다 아늑했다.
하지만 내 캐리어가 두꺼워서 침대 아래의 수납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침대 옆 커튼 안쪽에 세워뒀다. 내일 예약할 숙소는 이런 점을 감안해서 찾아봐야겠다.
머리맡의 조명을 끈 후 태국에서의 첫 번째 잠을 청했다.